수령칠사(守令七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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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수령이 고을을 다스리는 데 힘써야 할 7가지 일.

개설

조선시대의 수령칠사(守令七事)는 고려시대의 수령오사(守令五事)에 기원하는 것으로, 태종과 세종대에 기틀이 마련된 뒤 성종대에 정비되어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수록되었다. 『경국대전』「이전(吏典)」 고과조(考課條)에 실린 수령칠사는 농상성(農桑盛)·호구증(戶口增)·학교흥(學校興)·군정수(軍政修)·부역균(賦役均)·사송간(詞訟簡)·간활식(奸猾息) 등 7가지로, 그 의미는 농상을 성하게 하고, 호구를 늘리고, 학교를 일으키고, 군정을 닦고, 역의 부과를 균등하게 하고, 소송을 간명하게 하고, 교활하고 간사한 버릇을 그치게 한다는 뜻이다.

수령칠사는 관찰사가 수령의 근무 성적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었으며, 수령에 제수된 관료가 임지로 떠나기 전 왕을 배알할 때 왕은 흔히 수령칠사의 내용을 하문하였다. 수령칠사에 대한 의미와 시정 방향에 대하여 문답 형식으로 기록한 『칠사문답(七事問答)』이 전한다.

내용 및 특징

조선시대의 수령칠사는 원나라와 고려의 수령오사에서 기원을 찾아볼 수 있다. 원나라에서는 1348년(원 지정 8) 호구증·전야벽(田野闢: 논밭을 개척함)·사송간·도적식(盜賊息: 도적을 그치게 함)·부역균의 오사가 보이고, 고려에서는 1347년(고려 우왕 즉위) 2월의 교에 전야벽·호구증·부역균·사송간·도적식 5가지로 전최(殿最)를 삼는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의 수령오사는 원나라의 수령오사와 배열 순서만 다를 뿐 문자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다.

1388년(고려 창왕 즉위) 7월 조준의 상소문에서는 전야벽·호구증·사송간·부역균·학교흥의 다섯 가지를 들고 있는데, 이는 이전의 오사에서 도적식을 빼고 학교흥을 넣은 것이다. 고려의 수령오사는 조선초기에도 한동안 그대로 사용되었다.

조선시대의 수령칠사는 1406년(태종 6) 12월 사헌부에서 아뢴 수령의 포폄법(褒貶法)에서 처음 등장하였다. 그런데 이때의 수령칠사는 존심인서(存心仁恕)·행기염근(行己廉謹)·봉행조령(奉行條令)·권과농상(勸課農桑)·수명학교(修明學校)·부역균평(賦役均平)·결송명윤(決訟明允) 등으로, 그 의미는 마음은 인과 서에 두고, 몸소 청렴과 근신을 행하고, 조칙과 법령을 받들어 행하고, 농상을 권장해 맡기고, 학교를 수리하고 학문 풍토를 밝게 하고, 역의 부과를 균등하고 공정하게 하고, 소송에 대한 판결을 공명하고 진실되게 한다는 것이다(『태종실록』 6년 12월 20일).

실록에서 『경국대전』과 똑같은 수령칠사 항목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1483년(성종 14) 9월 성종이 평택현감으로 부임하는 변징원(卞澄源)을 인견하고 수령칠사를 물었을 때 농상성·학교흥·사송간·간활식·군정수·호구증·부역균의 7가지를 암송하고, 각각의 항목에 대한 성종의 구체적인 질문에 답변하고 있는 기사이다(『성종실록』 14년 9월 5일). 따라서 『경국대전』에 보이는 수령칠사는 태종과 세종대에 기틀이 마련되었다가, 『성종실록(成宗實錄)』에 보이는 수령칠사와 같이 간결하게 다듬어져 『경국대전』에 수록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수령칠사는 수령의 고과, 즉 수령의 성적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는 것으로, 1년에 두 번 지방 장관이 상중하로 등제를 매겨 중앙에 보고하였다. 이를 전최라고 하는데, 전은 맨 아래 등급을, 최는 맨 위 등급을 말하며 관리의 현부(賢否)를 출척한다는 뜻에서 전최의 법은 고적의 법과 같은 말로 사용되었다. 감사는 소관 지역을 순력(巡歷)하여 수령의 치적을 공정하게 고과하고 연 2회 등제 계문하였는데, 『경국대전』 고과조에 보이는 것처럼 관찰사는 수령칠사 실적을 갖추어서 계문한다 하여 칠사의 실적을 고과의 기준으로 삼았다.

감사가 수령칠사에 대하여 행한 고과표를 밀봉하여 왕에게 직접 올리면 왕은 친히 열람하고 승지로 하여금 봉함한 후 이조에 송부하게 하였다. 이조에서는 접수와 동시에 이를 전사하여 사헌부로 이문(移文)하였다. 감사가 평가하여 계문한 고과는 수령의 포폄에 직결되었기 때문에 절대적인 권위를 가졌다. 하지만 상중하로 등제하는 고과에 뚜렷한 비율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때로는 수령들의 성적이 거의 모두가 상으로 등제되는 등의 모순도 없지 않았다.

변천

수령칠사는 중앙 집권 정책의 확립과 서민 생활의 안정을 위한 위민 정치의 중요 방향을 담고 있었다. 농업의 발전을 위한 노력은 당시 농사가 기간산업이었기 때문에 말할 나위 없이 중요한 문제였다. 저수지의 수축과 관리, 황무지 개간, 뽕나무와 목화의 재배, 적기에 맞춘 파종과 수확 따위는 농산물 증산을 위하여 수령이 책임지고 시행하여야 할 중요 과제였다. 호구 증가의 문제는 수령이 선정을 펴서 백성의 생활이 향상되고 안정되면 자연히 이루어지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학교 교육의 진흥 문제는 유교적 정치 이념으로 무장하려는 조선에서 강력히 추진되어야 할 필수 요건이었다. 유생을 모아 유교 경전을 가르침으로써 유교적 윤리 규범을 확립할 수 있고, 충효 사상에 입각한 군신 간의 윤리를 체계화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군사 문제도 수령에게 대단히 중요하였다. 양민의 군역을 고르게 부과하며, 규율을 엄격히 하고 때에 맞추어 진법을 익히고 연습해야 했다. 특히 양계 지방은 일찍이 군익도(軍翼道) 체제가 이루어졌고, 이 체제는 점차 전국으로 확산되어 수령이 각 익의 지휘관을 겸임하다가 세조 때 진관 체제로 개편되었다.

이에 따라 수령들의 군직 겸임의 명칭도 다소의 변화가 있어 부윤은 절제사, 목사와 부사는 첨절제사, 군수는 동첨절제사, 현령은 절제도위를 겸하게 되었다. 어쨌든 군사 문제는 국가의 안위나 존망과도 직결되어 있어서 추호의 소홀함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따라서 병이 들었다는 핑계를 대며 군역을 대리하게 하는 일 따위를 수령은 철저히 조사하여 가려내야 했다.

부역도 군사 문제와 함께 백성이 지는 의무 중에 비중이 큰 것이었다. 각종 토목 공사 및 국가적인 행사에 백성이 동원되는 과정에서 자주 문제점이 발생했다. 부역은 특히 수령의 권한이 크게 작용하였으며, 백성을 괴롭히는 신역(身役)이었다. 따라서 시행 과정에서 부작용도 적지 않아 위정자들이 수령에게 각별히 당부하는 문제이었다. 사송은 민원의 대상으로서 억울함이 없도록 해야 백성들이 관을 신뢰하고 모든 일에 협조 협력할 수 있을 것이다. 수령은 형옥에 관한 모든 일을 맡고 있었으나 태형 이하만을 직접 처리할 수 있고, 관찰사는 유형 이하만을 처리할 수 있게 하는 등 권력의 남용을 적극 규제했다.

이와 같은 수령칠사는 조선중기와 후기에도 그대로 지켜져 왔다. 1737년 영조는 인재의 선택을 하교하면서 목민관의 역할에서 수령칠사의 중요성을 예시하고 있다(『영조실록』 38년 1월 18일). 이후 1793년(정조 17)에도 수령칠사에 대한 기록이 보이는 바로 보아 이 시기까지도 지켜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는 수령칠사에 대한 의미와 시정 방향에 대하여 문답 형식으로 기록한 『칠사문답』이 소장되어 있으며,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는 지방관들이 백성들에게 해야 할 일을 자세히 기록한 『선각록(先覺錄)』에도 「수령칠사문답(守令七事問答)」이 수록되어 있어서 주목된다. 이는 조선후기에도 여전히 수령칠사가 목민관의 지침서로 중시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김성준, 「고려시대의 양리(良吏)」, 『한국중세정치법제사연구』, 1985.
  • 김성준, 「조선수령칠사와 목민심감」, 『민족문화연구』21, 1988.
  • 구완회, 「조선후기 수취행정과 수령의 요예」, 『경북사학』14, 1991.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