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이(孫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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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의 대신으로 강희제 초에 수보정(首輔政)의 지위에 올랐던 소닌([索尼], sonin)의 한자 이름.

개설

소닌은 허셔리([赫舍里], hešeri)씨로 만주 정황기인(正黃旗人)이었다. 청조의 개국공신 중 한명이었다. 소닌은 그의 부친인 쇼서([碩色], šose), 숙부인 히퍼([希福], hife)와 함께 만주어와 몽골어, 한어(漢語)에 두루 능하였다. 누르하치([奴兒哈赤], nurhaci)는 쇼서와 히퍼 형제를 문관에 등용하여 박시([巴克什], baksi)로 삼았고, 소닌은 일등 시위(一等侍衛)로 삼아 정벌마다 대동하였다. 이후 소닌은 박시가 되었으며, 순치(順治) 연간에는 보정(輔政)으로서 강한 권력을 누렸고, 강희(康熙) 연간 초 4명의 보정대신[四位輔政大臣] 가운데 으뜸의 지위에 있었다.

가계

소닌의 아버지는 쇼서, 숙부는 대학사히퍼이다. 쇼서 형제는 누르하치가 처음 흥기하던 시기에 해서여진(海西女眞)의 하다([哈達], hada)부에서 귀부하였다. 소닌은 갈포라(噶布喇)·색액도(索額圖)·심유(心裕)·법보(法保) 등의 아들을 두었고, 이 중 갈포라의 딸은 강희 연간에 황태자로 임명되었던 윤잉(胤礽)의 생모인 효성인황후(孝誠仁皇后)이다.

활동 사항

소닌은 문관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군공도 적지 않은 인물이었다. 소닌은 아버지 쇼서를 따라 건주여진으로 귀부한 뒤 일등 시위(一等侍衛)에 임명되어 누르하치를 따라 여러 전장에 종군하였다. 홍타이지([皇太極], hongtaiji)가 즉위한 뒤 금주(錦州)와 영원(寧遠)을 공략할 때 공을 세웠다. 1628년 후금(後金)이 칼카([喀爾喀], kalka) 몽골을 정벌할 때 몽골의 코르친([科爾沁], korcin) 세력이 징병에 응하지 않자 홍타이지는 소닌을 보내어 질책하도록 하였는데, 이때 소닌은 훌륭히 임무를 수행하여 사과 및 병력 조발 약속을 받아냄으로써 홍타이지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1629년 후금군이 북경 일대를 포위하였다가 명군 장수 원숭환(袁崇煥)의 반격으로 위기를 맞았을 때 소닌은 포위를 뚫고 홍타이지의 큰 아들인 호오거([豪格], hooge)를 구출하는 공을 세웠고, 1630년에는 명의 진자진(榛子鎭), 사하역(沙河驛)을 항복시키는 한편 영평(永平)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1631년 소닌은 이부(吏部)의 계심랑(啓心郎)으로 발탁되었고, 후금이 명의 대릉하성(大凌河城)을 포위하였을 때에도 참가하여 금주에서 출동한 명의 구원군을 격파하였다. 1632년 몽골의 차하르([察哈爾], cahar) 세력 공격에 참가하여 대동(大同)을 공격하고 부대채(阜臺寨)를 함락한 공으로 니루 어전(nirui ejen)의 세직(世職)을 받았다. 이때부터 소닌은 주로 내삼원(內三院, [bithei ilan yamun])의 박시로 활동하였고, 1643년에 삼등 잘란 어전([甲喇章京], jalan ejen)으로 임명되었다.

소닌은 홍타이지가 죽은 이후 도르곤([多爾袞], dorgon)과 호오거 제위의 계승 논쟁에 참여하였다. 그는 홍타이지의 아들을 황제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여 순치제가 즉위하는 데에 기여하였고, 1645년 이등 암바 장긴([昻邦章京], amba janggin)으로 승진하였다. 1648년 소닌은 숙친왕(肅親王)호오거를 옹립하려 했다는 혐의를 받아 겨우 사형을 면하고, 관작을 삭탈당하였다. 그러나 1651년 도르곤이 죽고 순치제가 친정(親政)하게 되면서 관작을 돌려받았고, 삼등 백작의 세습직을 받았으며 의정대신(議政大臣)과 총관내무부사(總管內務府事)를 겸하였다. 조선에서는 소닌이 홍타이지와 순치제의 신임을 받았으나 급하고 사나운 성정으로 인하여 평민이 되었다가 서인이 된 것으로 파악하기도 하였다(『효종실록』 2년 6월 3일).

1661년 순치제가 사망하면서 남긴 유조(遺詔)에 따라 소닌은 보정대신(輔政大臣)으로 임명되었다. 소닌은 강희 연간 초에 사위보정대신(四位輔政大臣) 중 으뜸의 지위에 해당하는 수보정(首輔政)으로 있으면서 황제를 보좌하였고, 또 자신의 손녀를 황후로 책봉하게 하기도 하였다(『현종개수실록』 6년 2월 26일).

1667년 3월 소닌은 강희제로 하여금 친정하도록 주청하였다. 강희제는 이를 거부하였지만, 주청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소닌에게 가장 높은 세습직인 일등공(一等公)을 내렸다. 그리고 이해 6월 소닌이 사망하자 강희제는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후한 장례를 치르도록 지시하였으며, 그의 권고를 받아들여 7월에 친정을 시작하였다. 또 소닌의 아들인 법보와 심유에게 각각 일등공(一等公)과 일등백(一等伯)을 세습하게 하고, 맏아들인 갈포라는 시위부(侍衛府)의 친군(親軍)을 통솔하는 정1품의 영시위내대신(領侍衛內大臣)으로 임명하여 우대하는 뜻을 표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 『만문노당(滿文老檔)』
  • 『청사고(淸史稿)』
  • 『동문휘고(同文彙考)』
  • 哈斯巴根, 「淸初的巴克什與滿蒙關係」, 『滿族硏究』, 2011年 4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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