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빙(設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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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의(襲衣) 혹은 소렴(小斂)을 하고 난 후에, 대렴(大斂) 전까지 대행대왕의 유해가 부패하지 않도록 얼음상자 위에 놓인 평상에 안치하는 절차.

개설

얼음상자를 빙반(氷槃)이라 하고, 대행대왕의 유해를 안치하는 상을 잔상(棧牀) 혹은 전평상(箭平牀)이라 하며, 그 주위에 쌓아놓은 얼음이 잔상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한 설치물을 잔방(棧防) 혹은 전방(箭防)이라 한다.

내용 및 특징

설빙에 필요한 도구는 공조(工曹)의 지시에 의해 선공감(繕工監)에서 제작하였는데, 그 제도는 그때 그때의 사정에 맞게 하도록 했다. 대행대왕의 신장이나 몸무게가 제각각이어서 통일된 규격으로 만들었을 경우에 문제가 발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잔상을 빙반 가운데에 설치하고 얼음을 빙반 안에 채운다. 그리고 대행대왕을 잔상 위로 옮긴다. 사면에 잔방을 설치하고, 잔방이 연접(連接)하는 네 모퉁이에는 쇠갈고리를 걸어서 튼튼하게 하고, 얼음을 빙 둘러 잔방의 높이만큼 쌓아올린다. 이때 얼음이 잔상 안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얼음은 음력 2월 이후부터 사용하도록 되어 있다. 이 시기가 아니더라도 절후(節候)를 헤아려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습의를 입혔거나 소렴을 하고 난 후에 얼음을 사용했다. 날씨가 그다지 덥지 않으면, 전목반(全木槃)에다 얼음을 담아서 적당하게 평상 아래와 사면에 놓는 것도 허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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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을 당한 2품 이상의 관료에게는 3일 내지 5일 동안 매일 얼음을 제공하여 녹은 얼음을 갈아서 쓰게 하였다. 정2품은 매일 15정을 주고, 종2품은 매일 10정을 주게 하였다. 『황명제서(皇明制書)』를 보면, 명나라에서는 얼음을 채취하여 빙음(氷窨)에 저장하였는데, 이 빙음에는 신선한 볏짚과 갈대자리 등을 완비하였다고 한다. 조선에서는 마른 미역을 사용했다는 설이 있으나, 의궤나 연대기 자료에는 얼음 외에 미역 사용에 관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변천

빙반은 1470년(경종 즉위) 이후부터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고 다만 얼음을 그릇에 담아 시상의 네 귀퉁이에 놓도록 하였다. 그 이유는 얼음 사용의 폐단을 줄이고자 한 것이라는데, 결국 며칠간의 얼음 사용이라는 것이 시신의 부패 방지에 별 의미가 없었음을 뜻한다.

그 후 영조 연간에 편찬된 『국조상례보편(國朝喪禮補編)』에는 여전히 설빙조가 수록되었다. 여기에는 잔방의 폭이 조정되었고, 덥지 않은 철에는 빙반으로 전목반 혹은 유기(鍮器)를 사용할 수 있도록 했으며, 토롱(土籠)과 고만초(菰蔓草)의 사용도 권장했다.

의의

시신의 부패 방지를 목적으로 얼음과 부수적으로 필요한 도구를 제작하여 사용한 조상들의 뛰어난 과학정신을 엿볼 수 있다.

참고문헌

  • 『국조상례보편(國朝喪禮補編)』
  • 『황명제서(皇明制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