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성(石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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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당시 명군의 조선 출병에 결정적 역할을 한 명의 병부상서(兵部尙書).

개설

석성(石星)의 자(字)는 공진(拱辰)이고, 호(號)는 동천(東泉)이다. 동명성(東明城) 석가정(石家井) 출신이다. 1559년 진사에 급제했다. 40여 년 동안 가정제·융경제·만력제 밑에서 관직 생활을 했다. 세 명의 황제를 모시면서 급사중(給事中), 대리승(大理丞), 태부경(太傅卿), 우부도어사(右副都御史), 공부(工部) 상서(尙書), 호부(戶部) 상서(尙書), 병부(兵部) 상서(尙書) 등의 관직을 역임했다.

1567년(명 융경 1) 목종이 즉위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사를 돌보지 않고 유흥에 빠져 지내자 이를 강력하게 비판하는 내용의 상소문을 올렸다. 석성의 상소에 분노한 목종은 그를 파직하고 장(杖) 60대의 처벌을 내린 뒤 평민으로 강등시켰다. 석성은 이후 계속 평민의 신분으로 생활했다. 신종이 즉위했던 1573년(명 만력 1, 선조 6)에 석성은 급사중, 대리시(大理寺) 승(丞), 남태부경(南太傅卿) 등의 관직을 역임했다. 이후 호부 상서를 거쳐서 병부 상서에 임명되었다.

1592년(명 만력 20)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조선에서 명의 지원을 요청했다. 당시 명 조정에서는 조선으로의 출병을 반대한 인물들이 많았는데 석성은 출병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따라서 명군의 조선 출병 과정에서 결정적 역할을 수행한 인물이었다고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명군의 출병 후 조선의 뜻과는 상관없이 심유경을 유격으로 임명해 일본군과의 강화를 맺기 위해 노력했다.

결국 일본군과의 강화는 실패했고 석성은 강화를 성사시키기 위해 황제와 명 조정에 거짓 보고를 하기도 했다. 이와 관련된 사안들이 전체적으로 문제가 되어 탄핵을 받아 투옥되었다. 그가 하옥되면서 부인과 자식들은 모두 광서(廣西) 지역으로 유배되었다. 1599년(명 만력 27, 선조 32)옥중에서 병사했다. 조선에서는 임진왜란 당시 그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해 종전 후 평양에 사당을 지어 제사를 지냈다.

활동 사항

임진왜란 개전 초기 요동 사람들이 조선이 일본과 공모해서 명을 공격하려 한다는 유언비어를 유포했다. 그렇기 때문에 명에서는 임세록(林世祿) 등을 평양으로 파견해 조선의 동정을 탐지하도록 했다. 결국 선조는 평양에서 피난하면서 요동에 연속으로 자문(咨文)을 보내 왕비, 자녀, 함께한 신하들과 함께 요동으로 들어가 지내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순무어사(巡撫御史)학걸(郝杰)은 황제에게 글을 올려 명 조정의 조치를 요청했다. 그는 조선이 스스로 대국(大國)이라 칭하면서 동번국(東藩國)의 역할을 해왔지만 왜적의 침입을 받자 소식만 듣고서 도망쳤다고 보고했다. 그는 조선이 사직을 보전하지 못하고 갑자기 피난 오게 될 경우, 변방의 신하라는 점에서 거절하기도 어렵고 받아들이자니 일이 가볍지 않아 자신이 마음대로 처리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에 병부 상서 석성은 먼저 조선에 관리를 파견해서 황제의 지극한 뜻을 널리 알릴 것을 건의했다. 그리고 만약 조선이 명으로 피난 오게 되면 일본군이 마침내 조선을 점거하게 될 것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따라서 조선이 요해지를 굳게 지키면서 명의 구원병을 기다리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석성은 황제가 유시를 내려 전국에 조선의 신료들을 많이 파견하여 근왕병(勤王兵)을 모집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동시에 만약 조선이 위급해서 피난을 요청한다면 전적으로 거절하기는 어려우니 마땅히 칙령(勅令)을 내려 받아들이되 인원이 1백 명을 넘지 않도록 하자고 주장했다.

신종은 왜적이 조선을 공격해 왕까지 피난하도록 했으니 매우 측은하게 생각한다면서 구원병과 관리를 파견해 자신의 뜻을 널리 알리겠다는 의사를 표현했다. 아울러 조선에 각처의 병마(兵馬)를 결집시켜 적의 접근을 막기 위해 성 둘레에 파놓은 연못인 성지(城池)를 굳게 지키며 요해처를 근거로 해서 국토를 방어하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요동에서는 여전히 조선에 대한 의심을 해소하지 못했다. 송국신(宋國臣)을 파견해 조선 왕의 의도를 파악하도록 했다. 송국신이 복귀해 피난하고 있는 선조가 진짜 조선의 왕이고 가짜 왕이 아니라고 보고하자 요동에서도 비로소 조선의 상황을 믿게 되었다.

중국 조정에서는 조선에 대한 출병 여부에 대한 논의가 계속 진행되고 있었다. 석성은 조선에 대한 구원을 결심했다. 당시 조선 사신 신점(申點)이 회동관(會同館)에 있었는데, 석성이 불러서 요동에서 보고한 문서를 꺼내어 보여주었다. 신점이 그 자리에서 통곡하며 아침저녁으로 찾아가 구원병의 파견을 요청했다. 곧이어 조선에서 파견한 유몽정(柳夢鼎)도 도착했는데, 그 역시 통곡하며 병부에 구원병을 속히 보내 달라고 요청했다. 석성은 이들의 뜻에 감동하여 모두에게 답서를 보내 위로했다.

조선에 구원병을 파견하기로 했던 석성의 뜻이 더욱 굳어졌다.

그리고 지휘(指揮)황응양(黃應暘)을 파견하여 조선 조정의 상황을 살펴보도록 했다. 황응양이 일본에서 조선에 보냈던 서신과 조선이 명에 보냈던 주본과 자문의 내용 등을 확인하고 돌아가서 이 내용들을 병부에 보고했다. 보고를 받은 석성은 크게 기뻐하며 조선에 대한 구원병의 파견을 결정했다(『선조수정실록』 25년 6월 1일).

이후 조선에서 명에 파견했던 정곤수(鄭崐壽)가 북경에서 돌아왔다. 명에서는 대병(大兵)의 출동을 약속하고 우선 은 3천 냥을 내려주었다. 정곤수가 처음에 경사에 도착하여 글을 올리자 황제는 즉시 병부에 의논하도록 지시했다. 당시 정곤수는 병부에 정문(呈文)하여 간곡하고 절박한 마음을 표현하면서 계속 구원군을 요청했다. 그리고 병부 상서 석성에게 가서 통곡하며 애절하게 호소했다.

당시 정곤수가 슬픔을 감당하지 못하면서 명의 구원군을 계속 요청하니 석성도 감동해서 눈물을 흘렸다. 조선에 대한 출병 여부는 중국 조정에서도 의견이 분분했다. 많은 명 조정의 신료들이 자국만을 방어하면 되기 때문에 굳이 많은 수의 병마(兵馬)를 징발하여 스스로 피폐하게 할 필요는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석성은 출병을 강력하게 주장하며 다른 신료들을 격동시켰다. 그는 자신이 직접 일본과의 전쟁에 참여하겠다고 주청했다.

결국 황제가 출병을 윤허해 병부(兵部) 시랑(侍郞) 송응창을 경략(經略)으로 삼아 먼저 2만의 군사를 인솔하고 출병하도록 조치했다. 곧이어 대군을 징발하고 장수들을 선발해 파견했다. 그리고 마가은(馬價銀) 3천 냥을 동원해 궁각(弓角)과 화약을 사서 보냈다(『선조수정실록』 25년 11월 1일).

이후 중국 조정에서는 일본군 진영의 사정을 파악하기 위해 유격심유경을 사자로 파견했다. 처음 조승훈(祖承訓)이 인솔하는 명군이 일본군에 대패했다. 이후 일본군은 더욱 기세가 올라 조선에 글을 보내 서쪽 지역으로 진출하겠다고 주장했다. 이에 조선 조정에서는 크게 두려워했다. 심유경은 본래 절강성(浙江省) 사람이었는데 이전부터 일본의 실정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석성이 유격이란 칭호를 붙여주면서 일본군의 사정을 정탐하도록 지시했다(『선조수정실록』 25년 9월 1일).

당시 명에서는 일본군의 기세가 날로 성해지자 정세를 심각하게 고민했다. 따라서 석성은 비밀리에 심유경을 파견했던 것이다. 심유경은 경영첨주유격(京營添住遊擊)이라고 가칭하고서 적의 상태를 살핀다는 핑계를 대고 일본군 진영을 왕래했다. 하지만 석성이 심유경을 일본군의 군영으로 파견했던 것은 강화협상을 진행하기 위해서였다(『선조실록』 25년 6월 29일).

그러나 임진왜란의 강화교섭은 결렬되고 말았다. 석성은 탄핵을 받고 자리에서 물러나 옥에 갇히게 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1599년(선조 32) 사은사신식(申湜)은 석성이 옥중에서 병사했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다고 보고했다(『선조실록』 32년 10월 13일). 며칠 후 선조는 시어소(時御所)에서 도사(都司)오종도(吳宗道)를 접견했다. 오종도는 심유경이 참형에 처해진다는 소식을 선조에게 전달했다. 아울러 석성이 옥중에서 이미 죽었다는 사실과 심유경을 참형에 처하자는 명 조정의 의논이 한 달쯤 되었다는 사실을 전달했다. 이에 선조는 석성은 조선에 공이 있는 인물인데 옥중에서 죽게 되었다며 놀라고 비통해하였다(『선조실록』 32년 10월 17일).

선조는 비망기를 내려 석성이 여러 해 동안 옥에 갇혀 있다가 옥중에서 죽은 것은 조선의 일 때문이니 평양의 사당에 관원을 보내어 제사를 지내주자고 제안했다. 선조는 석성이 비록 명에서 처벌을 받았지만 조선의 입장에서는 구원한 은혜가 크기 때문에 사사로운 정을 갚지 않을 수 없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자신의 제안에 대한 의견을 예조에 물었다(『선조실록』 32년 10월 20일).

예조에서도 영의정이원익(李元翼)과 우의정이헌국(李憲國) 등이 석성이 당초 조선의 일 때문에 옥중에서 죽었으므로 선조의 뜻에 따라 평양의 사당에서 치제해야 한다고 응답했다. 선조 역시 예조에서 아뢴 대로 석성에 대한 치제를 시행하라고 전교했다. 반면 당시 사신(史臣)은 석성이 대신으로 화의를 강력하게 주장하다가 처벌을 받아 옥중에서 죽었으니, 이는 대의에 해당하는 조치라고 기록을 남겼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에서 사사로운 은혜로 천하 후세에 죄를 지은 자에게 제를 지내주어서는 안 된다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선조실록』 32년 10월 21일).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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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명목종실록(明穆宗實錄)』
  • 『명사(明史)』
  • 『명세종실록(明世宗實錄)』
  • 『명신종실록(明神宗實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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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