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진역(別珍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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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전라도 지역의 역도 중 하나인 벽사도에 속한 역.

개설

고려시대에 별진역(別珍驛)은 승나주도(昇羅州道)에 소속된 30개 속역 가운데 하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전라좌도의 역도(驛道)벽사도(碧沙道)에 소속되었다. 이후 조선시대 후기까지 존속하다가 갑오개혁 때 폐지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고려사(高麗史)』「병지(兵志)」 참역(站驛) 조에 따르면 고려시대에는 승나주도의 속역으로, 오늘날의 해남 지역에 위치하였던 죽산(竹山)에 위치하였다.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문종대 이후에 고려의 역제(驛制)가 22역도-525속역 체제로 정비되는 과정에서 승나주도에 편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조직 및 역할

조선 영조 때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 전라도 해남 조에 따르면, 당시 별진역에는 역리(驛吏) 10명, 역노(驛奴) 20명과 역마 10필이 배속되어 있었다. 그에 비해 1895년(고종 32)에 작성된 『호남역지(湖南驛誌)』 벽사도역지(碧沙道驛誌)에는, 10명의 보종(步從)과 10필의 역마가 배속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변천

조선시대에는 건국 직후부터 수도인 한양을 중심으로 기존의 역로를 개편하였으며, 특히 세종대에는 북방 지역을 개척하면서 전국적으로 역로를 재조직하였다. 별진역은 그 과정에서 전라도의 역도인 벽사도에 소속되어 역승(驛丞)의 지휘를 받았다[『세종실록』 지리지 전라도].

1457년(세조 3)의 역승 폐지 조치로 찰방의 순시 범위가 넓어지면서 각 역도에 소속된 역의 수가 많고 역 사이의 거리가 멀어 역로가 쇠퇴하는 등의 폐단이 발생함에 따라 1462년(세조 8)에 대대적인 역로 개편이 추진되었다. 이 과정에서 별진역은 이전과 다름없이 벽사도의 속역으로 유지되었다(『세조실록』 8년 8월 5일). 이후 조선시대 후기까지 벽사도의 속역으로 존속하다가, 1896년(고종 33) 1월에 대한제국 칙령 제9호 ‘각 역 찰방 및 역속 폐지에 관한 건’에 따라 폐지되었다.

한편 『여지도서』에 따르면, 별진역은 해남현 북쪽 30리 지점에 위치해 있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조병로, 『한국근세 역제사연구』, 국학자료원,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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