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사(精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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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 연구나 정신 수양을 위하여 세운 집.

개설

정사(精舍)는 단어의 뜻 그대로 ‘학문을 가르치기 위하여 마련한 학사(學舍)나 서원(書院)’을 의미하며 ‘정신을 수양하는 곳’이라는 의미에서 ‘절’을 뜻하기도 한다.

내용 및 특징

정사의 사전적 의미는 ‘정신이 머물러 있는 곳’으로 가르침을 베푸는 학사·서당의 의미와, 정신을 수양하는 곳이라는 의미에서 사찰, 암자를 뜻하기도 한다. 즉 불교건축물로서의 정사와 유교 건축물로서의 정사가 혼용되고 있는 셈이다. 대체로 불교적 정사가 시간이 흐르면서 운영 주체와 성격이 달라진 사례가 많았다. 그래서 불교 수행을 위한 사찰의 암자였던 정사가 조선시대에 유학자들의 은거, 강학, 연찬(硏鑽)의 장소로 변하기도 하고, 때로는 재실(齋室)의 전신인 분암(墳庵)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정사는 원래 부처님이 살아 계실 때의 절 이름에서 유래한 것으로 불교 최초의 절이라 할 수 있는 죽림정사(竹林精舍)가 바로 정사였다. 당시의 절은 비를 피할 큰 움막과 수행할 뜰이 있는 동산 정도의 형태였으므로 잠시 머물며 수행하는 곳이라는 의미가 더 컸다. 사찰의 암자로 그 명성과 역사가 오랜 경우 정사로 이름이 붙여진 곳이 많다. 현재도 정사는 사찰 본연의 임무를 수행하기보다는 수행을 위한 장소를 높여 부르는 말이다.

변천

우리나라에서 정사의 발달은 주자학의 확산과 더불어 이루어졌다. 명망 있는 선비가 자신의 고향이나 경치가 좋은 장소를 택해 은거하면서 강학소(講學所)로 정사를 개설하거나, 훌륭한 인물들을 흠모하는 후학들이 모여 정사를 세우고 수학하였다. 도교나 유교를 숭상하는 학자들도 수행 과정에서 산천 경관이 좋은 곳에 정사를 세우고 원력(願力)을 들여 수행하기도 하였다. 송나라의 주희가 경관이 뛰어난 무이산(武夷山)에 정사를 지어 무이구곡(武夷九曲)을 감상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한 것이나, 율곡이이가 황해도 해주의 석담천(石潭川)에 고산구곡(高山九曲)을 설정하여 정사를 짓고 스스로를 수양할 뿐만 아니라 제자들을 훈도한 것도 그러한 사례이다.

정사는 대부분 깊은 산중에 위치한 경우가 많으나, 마을 부근이나 마을 안에, 혹은 종가의 부속 건물로 세워져 서사(書社), 서숙(書塾), 서제(書齋), 서당(書堂)과 같은 기능을 하기도 하였다. 때로는 양반가의 고택 사랑채의 당호(堂號)를 정사라 하기도 하였고, 서원 중에는 정사로 그 이름을 지은 사례도 있었다.

참고문헌

  • 김나래, 「17세기 선비들의 건축 성향: 우암 송시열의 정사 경영을 중심으로」, 경기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2.
  • 안정희, 「기호·영남 지방의 정사(精舍) 건축 조영 특성」, 충북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3.
  • 이종윤, 「전남 지역 정사(精舍)의 건축적 특성에 관한 연구: 해방 이전에 건립된 정사를 중심으로」, 조선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93.
  • 이해준, 「광산 김씨 분암(墳菴) “영사암(永思菴)” 자료의 성격: 충남 논산 지역 광산 김씨 사례」, 『고문서연구』25,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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