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필각(御筆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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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손수 쓴 글씨 및 서적을 보관하는 전각.

개설

어필각(御筆閣)은 왕에게서 받은 친필이나 서적 등을 보관하기 위해 지은 건물로 사찰, 서원, 문중이나 고택 등에 남아 있다. 사찰의 어필각은 사찰이 왕실원당으로 지정될 때 왕에게 하사받은 글씨를 봉안하기 위해 지은 것이다.

내용 및 특징

조선시대 최초로 지어진 어필각은 함경도 안변의 석왕사(釋王寺) 어필각이다. 1392년(태조 1) 태조가 즉위하기 전에 태조의 기도처인 위축원당(爲祝願堂)으로 지정된 석왕사는 조선말기까지 왕실의 특별한 보호를 받은 사찰이다. 태조는 석왕사에 자신의 어제어필(御製御筆)을 하사하고 어필각을 세웠으며, 이후 숙종, 영조, 정조가 친히 어필을 하사하여 어필각에 봉안하였기 때문에 석왕사 어필각을 ‘열성어필각’이라고 하였다(『순조실록부록』 10년 5월 15일).

이후 세종의 왕자 세조와 그 형제들의 태를 보관한 태실(胎室)이 있는 태봉(胎峰)에서 약 200m 거리에 위치하고 있었던 경상북도 성주 선석사(禪石寺)는 세종대에 태실 수호사찰로 지정되었다. 선석사 어필각이 언제 세워졌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으나 영조대에 왕으로부터 어필을 하사받아 어필각에 봉안하였는데, 1804년(순조 4) 중창될 당시에도 어필각이 있었으나 그 이후 소실되었다. 현재 영조의 어필 병풍은 선석사 경내의 정법료(正法寮)에 보관되어 있다.

충청남도 임천의 오덕사(五德寺) 또한 1570년(선조 3) 선조의 태실 수호사찰로 지정되면서 왕이 어필과 용포(龍袍)를 하사하자 이를 봉안하기 위해 어필각을 지었다.

이처럼 사찰에 어필이 하사되는 경우는 그 사찰이 현재의 왕이나 선왕의 원당으로 지정되었던 경우가 대부분이다. 사찰에 왕의 어필이 봉안되었다는 것은 왕의 어실이 마련된 것과 거의 비슷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왕의 어필이 보관되거나 어진, 위패가 보관되는 경우에는 하마비가 세워지고 금표가 쳐졌기 때문에 사대부나 일반인들의 출입이 통제되었다. 또한 어필을 봉안한다는 것은 곧 왕실의 복락을 기원하는 사찰로 지정되었음을 의미하였으므로 어필 봉안 사찰은 특별 보호 대상이 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사대부의 사저에 지은 어서각에 대한 기록도 나타난다. 1728년(영조 4) 왕명에 따라 해조(該曹)에서 최규서(崔奎瑞)의 본가(本家)에다 한 칸 집을 지어 어서(御書)를 봉안하게 하고 ‘어서각(御書閣)’이라고 이름하였다(『영조실록』 4년 4월 22일).

또한 선조가 의주로 피난 갔을 때 ‘향대부(鄕大夫)’라는 세 글자를 쓴 친필을 보관한 어필각이 고종대까지 의주에 남아 있었다(『고종실록』 39년 5월 27일) (『고종실록』 39년 10월 6일).

참고문헌

  • 『임천읍지(林川邑誌)』
  • 권상로, 『한국사찰전서』, 동국대학교출판부, 1979.
  • 한국불교연구원, 『북한의 사찰』, 일지사,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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