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印)

sillokwiki
Silman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7년 12월 10일 (일) 02:35 판 (XML 가져오기)

(차이) ← 이전 판 | 최신판 (차이) | 다음 판 → (차이)
이동: 둘러보기, 검색



문자를 새기거나 주조하여 개인과 집단을 상징하는 도구.

개설

인(印)은 인장(印章)과 같은 의미로 관인(官印)사인(私印)을 포괄하는 용어이다. 또한 개인의 상징이자 신표(信標)라는 의미에서 서명(署名)과 관련이 있다. 개인의 서명 방식은 착명(着名)과 서압(署押)이 있었으며, 기원을 전후하여 중원에서 한반도로 유입되었다. 착명은 서(署)라고 하였는데, 처음에는 관위(官位)를 표지하는 그 무엇에서 시작하여 점차 이름 글자를 변형한 서명 방식으로 정착되었다. 서압은 애초부터 문권(文券)에 두는 신표의 수단으로 만들어졌다.

서명은 필기도구를 이용하여 쓰는 방식이므로 일회적인 반면, 인은 견고한 물질에 새기거나 주조하여 반영구적으로 사용한다는 차이가 있고, 내용상 국가나 집단까지 포함하므로 좀 더 포괄적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인이나 서명의 대용으로 손가락이나 손바닥을 이용한 수촌(手寸)과 수장(手掌)이 응용되었고, 지문을 이용한 지장(指章)이 현대에도 사용되고 있다.

내용 및 특징

동한의 경학자 허신(許愼)의 『설문해자(說文解字)』에 “인은 행정 관료가 지니는 신표로 ‘조(爪)’와 ‘절(卪)’로 구성되었다. 인부(印部)에 속하는 한자는 모두 인의 의미를 따른다.”고 하였고, 청의 학자 단옥재(段玉裁)의 『설문해자주(說文解字注)』에서는 ‘인’ 자에 대해 『주례(周禮)』와 『한관의(漢官儀)』 등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상세한 주석을 더하였다.

“관직이 있는 사람은 모두 집정(執政)이라 부른다. 그들이 가진 신표를 인이라고 하는데 옛날에는 상하 관료 모두 새(璽)라고 하였다. 『주례』의 새절(璽節)에 대한 주에서는 ‘새란 지금의 인장’이라고 하였다. 『주례』를 살펴보면 ‘방국(邦國)을 지키는 사람은 옥절(玉節)을 쓰고 도비(都鄙)를 지키는 사람은 각절(角節)을 쓴다’라고 하고, ‘제후는 그의 나라에서, 공경대부는 그의 채읍(采邑)에서 사용하였다는 말이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곧 인을 사용했던 시초였다.

계무자(季武子)가 『주례』에서 ‘도비를 지키는 자가 되어 새서(璽書)를 노군(魯君)에게 보냈다’고 하였으니 이를 통해 옛날에 인이 있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간책(簡冊)에 내용을 쓴 다음 그 글을 멀리 보낼 때에는 반드시 포백(布帛)으로 봉하고 새를 가지고 인주에 묻혀 찍었던 것 같다. 죽간(竹簡) 대신에 비단이나 천에다 쓰게 되자 인의 용도가 더욱 넓어졌다.

『한관의』에서 ‘제후 왕은 황금에 낙타 손잡이인데 그 문(文)은 새라 하고, 열후(列侯)는 황금에 거북 손잡이를 사용하고 그 문은 장(章)이라 하고, 어사대부(御史大夫)는 금인(金印)에 자색(紫色) 끈으로 그 문은 장이라 하고, 중이천석(中二千石)은 은인(銀印)에 거북 손잡이로 문은 장이라 하고, 천석(千石)에서 사백석(四百石)에 이르는 대부는 동인(銅印)에 문은 인이라 한다’고 하였다.”

단옥재는 주석에서 『주례』와 『한관의』 등을 인용하여 인의 기원을 주대로 설정하였다. 시대와 신분에 따른 명칭의 변화상을 추적하고, 한의 제도를 통하여 인의 문구, 손잡이의 모양, 재질 등 사용자의 신분에 따른 제도와 규정을 구체적으로 검토하였다. 성희명(盛熈明)은 『법서고(法書考)』에서 “칠웅 때에 신하의 인장을 처음으로 인이라 칭했다.”고 하여 전국시대부터 인을 사용하였음을 밝혔다. 또한 주검심(朱劍心)은 『금석학(金石學)』에서 『한구의(漢舊儀)』를 인용하여 “진 이후 천자만이 새와 보(寶)를 사용한 이후 군신은 감히 쓸 수 없어 비로소 인이 생겨났다.”고 하여, 본래 신분에 의해 분리된 용어임을 언급하였다.

인은 크게 관인과 사인으로 나누어진다. 관인은 중앙과 지방의 관서나 군영에서 공무에 사용하는 인장이다. 조선시대의 경우 크게 경관인(京官印)과 외관인(外官印)으로 나눌 수 있다. 경관인은 육조(六曹)를 포함한 중앙 기구의 공식 인장이며, 외관인은 왕명으로 팔도에 파견된 각 지방관의 인장이다. 경관과 외관의 모든 관인은 국가의 제도와 관련되므로 예조(禮曹)의 계제사(稽制司)에서 관할하였다.

사인은 주로 서화나 서책, 간찰 등에 사용하는 개인의 인장으로 성명자호인(姓名字號印), 사구인(詞句印), 수장인(收藏印)·감상인(鑑賞印), 봉함인(封緘印), 부인도서(婦人圖書)로 나눌 수 있다. 성명자호인은 성명, 자, 호를 비롯하여 별호, 당호, 관향의 내용을 담고 있다. 사구인은 시구나 문장을 새긴 인장으로 경전, 감계, 길상의 내용이 나타나기도 한다. 수장인·감상인은 주로 서화나 서책에 소유나 감상을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한 인장으로 ‘~비급(~秘笈)’, ‘~영보(~永寶)’, ‘~장서(~藏書)’, ‘~가장(~家藏)’, ‘~진상(~眞賞)’, ‘~진상(~珍賞)’, ‘~도서기(~圖書記)’ 등 다양한 문구로 나타난다.

봉함인은 간찰의 겉봉에 봉함의 목적으로 사용하는 인장으로 인곽(印郭), 서체(書體), 포치(布置) 면에서 다른 사인과는 달리 특수한 양식을 띤다. 문구는 봉함구(封緘句), 경전구(經傳句), 길상구(吉祥句), 기원구(祈願句), 공경구(恭敬句) 등 다양하다. 부인도서는 조선시대에 착명, 서압으로 서명하였던 남성과는 달리 인장으로 대신한 여성의 신표로 다른 사인과는 달리 증빙의 성격을 지닌 문서에 사용하였다. 인문은 조선초기에 ‘○향○씨(某鄕某氏)’로 하였고, 이후에는 주로 ‘○처○씨(某妻某氏)’로 하였다.

변천

우리나라에서는 인장을 의미하는 ‘인’ 자를 끝으로 발음하고, 관부(官簿)의 말단에 써서 문건의 종결을 의미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용례로 국보 제131호인 「이태조호적원본(李太祖戶籍原本)」이 있다. 이 문서에는 문장의 끝마다 ‘인’ 자를 써서 내용의 끝을 표시하였다. 이 호적은 1390년(고려 공양왕 2)에 조선을 건국한 태조이성계의 본향인 영흥에서 작성하였으므로 ‘인’ 자를 종결의 의미로 사용한 전통은 고려로부터 전해졌다고 할 수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인장 또는 도장(圖章)이란 용어를 흔히 쓴다. 인장은 모두 같은 의미를 갖는 ‘인(印)’과 ‘장(章)’이 결합된 합성어이며,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는 자세하지 않다. 그러나 두 글자 모두 위에서 살핀 바와 같이 오랜 시간 동안 사용되었으며 관인과 사인을 포괄하는 용어로 정착되었다. 한편 도장, 도서(圖書), 도서(圖署)와 같이 그림 ‘도(圖)’ 자가 인장의 의미에 포함된 시기는 대체로 송대(宋代)로 전해지며, 주로 도서(圖書)로부터 시작되었다. 도서는 처음에 그림이나 서적에 자신의 소유임을 표시하기 위해 ‘○○도서’로 제작하여 사용하면서 인장의 이칭이 되었다. 조선시대부터 도장과 도서는 주로 사인의 의미로 정착되었다.

참고문헌

  •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근기실학연원제현집』,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2002.
  • 심재, 『송천필담』, 민창문화사, 1994.
  • 박준호, 「한국 고문서의 서명 형식에 관한 연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4.
  • 尾峙雄二郞 編, 『訓讀 說文解字注』匏冊, 東海大學出版會, 1993.
  • 朱劍心, 『金石學』, 臺灣商務印書館, 1995.
  • 韓天衡 編訂, 『歷代印學論文選』, 西泠印社, 1999.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