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포(完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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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곡 운영 과정에서 다양한 형태로 발생하는 원곡의 손실을 채워 넣는 것.

개설

환곡은 본래 기근이 발생하면 농민의 생존을 보장하고 다음 해 농사를 돕기 위하여, 곡식을 꿔 주고 추수 후 갚도록 하던 제도였다. 그러나 제도의 운영 과정에서 원곡의 손실분이 자꾸 발생하였는데 이를 포흠(逋欠)이라 하였다. 포흠은 환곡을 받은 백성이 원곡을 상환하지 못하여 발생하는 민포(民逋)와 서리의 농간에 의해서 발생하는 이포(吏逋)가 있었다. 국가에서는 이들 포흠을 채워 넣기 위하여 여러 정책적 조치를 취하였는데, 이렇게 포흠을 채워 넣는 것을 완포(完逋)라 일컬었다(『헌종실록』 5년 7월 12일).

내용 및 특징

환곡의 곡식을 빌려주고 받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손실되는 곡식이 발생하였다. 국가에서 그 손실분을 감당하는 데 무리가 생기자 원곡을 갚을 때 모곡(耗穀)의 명목으로 1/10 정도를 더 갚도록 하였다. 그런데 조선후기가 되면 중앙 아문의 재정이 환곡의 모곡에 크게 의존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포흠이 발생하면 남은 환곡에 대한 모곡 징수량을 늘려 재원을 충당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하여 백성에 대한 수탈이 강화되었고, 심지어는 곡식의 분급 없이 모곡만 징수하는 경우도 발생하게 되었다.

결국 국가에서는 포흠분을 채워 넣기 위한 다양한 정책을 모색하게 되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탕감(蕩減)이었다. 상환하지 못한 곡식을 탕감함으로써 재정 운영을 현실화하는 한편, 민폐도 제거하려 하였다. 탕감은 포흠을 해결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으나, 한편으로는 재정 운영에 큰 부담이 되기도 하였다.

누적된 미수곡(未收穀)에 대하여 이자를 제외하고 원곡만을 몇 년에 걸쳐 받게 하는 한년배봉(限年排捧) 역시 포흠을 해결하는 방법 중 하나였다(『고종실록』 22년 3월 10일). 결당 얼마씩을 부담하여 포흠분을 채워 넣는 도결(都結) 역시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들은 궁극적으로 백성에게 부담을 전가하는 방식이었다. 특히 서리의 농간에 의해 발생한 포흠분을 위와 같은 방식으로 해결할 때에는 백성의 강한 저항이 뒤따르기도 하였다. 몇 년 동안의 상환 과정에서 새로운 포흠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들 방법은 국가의 재정 부담을 최소화할 수 있는 완포 방식이었으므로 탕감과 더불어 자주 사용되었다.

변천

19세기 말 환곡 운영이 문란해지면서, 대량의 포흠이 발생하였다. 그런데 중앙정부에서는 포흠을 해결하기 위한 재정 부담을 백성에게 대부분 전가하면서 1862년 농민 항쟁의 주된 원인이 되었다. 농민 항쟁 이후 환곡 운영의 총액은 점차 감소하였고, 1894년 갑오개혁 이후에는 환곡이 폐지되기에 이르렀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만기요람(萬機要覽)』
  • 송찬섭, 『조선 후기 환곡제 개혁 연구』,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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