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진도사(御眞圖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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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숙종대 이후 왕의 초상화를 그리는 일을 지칭하는 용어.

개설

조선시대에는 왕의 초상을 어진(御眞) 또는 어용(御容)이라고 했다. 도사(圖寫)란 기왕의 영정(影幀)을 원본으로 하여 그리는 것이 아니라 국왕의 모습을 보고 그린다는 뜻을 담은 용어이다.

용어의 유래

조선시대에는 선대왕들의 초상화를 부를 때 영정, 어진, 어용이라는 표현을 썼다. 이를 바탕으로 다시 그리는 일을 지칭할 때에는 모사(模寫) 또는 모화(模畵), 이모(移模)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현왕의 어진을 그리는 일을 선왕의 어진을 옮겨 그리는 일과 구분하여 지칭하게 된 것은 숙종대의 일이다. 숙종은 1695년에 조정에 알리지 않고 화원 조세걸(曺世傑)에게 초상화를 그리게 한 후 이를 강화도에 옮겨 보관하게 했다. 강화부에서는 영전(影殿)을 건립한 후 어진을 봉안하고, 정기적인 봉심을 통해 초상화를 관리했는데, 이 초상이 숙종과 거의 닮지 않았다는 의견이 제기되었다(『숙종실록』 39년 3월 30일). 진면목을 담아내지 못한 구초상 대신에 새로 초상을 그려 봉안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숙종은 새 어진의 초본을 그린 후 대신들에게 보여 전신이 제대로 되었는지 확인하게 했다(『숙종실록』 39년 4월 8일). 이것이 기준에 미치지 못하자 더 좋은 화본을 얻기 위해 화원과 대신들이 임금의 얼굴을 자세히 보고, 그 후에 다시 초본을 그리고 검토·수정하는 절차를 걸친 후 정본으로 정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다. 또 이 일의 중요성을 따져볼 때 도감을 설치하여 관리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와 처음으로 도감을 설치하게 되었다. 이조에서 정한 도감의 명칭은 처음에는 어용모사도감(御容模寫都監)이었다. 구본을 모사하는 것과 달리 왕을 직접 보고 그리는 것이므로 모사 대신 도사라는 용어를 쓰도록 하여 어용도사이라는 명칭이 확정되었다. 이후 현왕의 어진을 그리는 일을 표현할 때에는 어진도사(御眞圖寫) 혹은 어용도사라고 지칭하였다.

변천

영조의 경우 총 13본에 이르는 어진을 남겼지만 어진을 그리기 위한 도감은 설치하지 않았다. 오직 1773년에 숙종이 어진을 그렸던 해와 같은 갑년이 되었을 때 80세 초상화를 그리면서 도감을 설치했는데, 이 도감의 명칭이 어진도사도감(御眞圖寫都監)이었다(『영조실록』 49년 1월 18일). 정조는 어진을 그리고 봉심하고 봉안하는 일을 규장각에서 담당하게 했는데, 이 일을 지칭할 때 어진을 도사한다고 하였다(『정조실록』 5년 9월 16일). 대한제국 선포 이후 1901년에 고종의 어진과 순종의 예진(睿眞)을 그린 후 평양에 봉안하였는데, 이 과정을 주관하기 위해 도감을 설치하였으며, 이 일을 기록한 『어진도사도감의궤』가 전한다.

참고문헌

  • 『(숙종)어용도사도감의궤((肅宗)御容圖寫都監儀軌)』
  • 『(고종)어진도사도감의궤((高宗)御眞圖寫都監儀軌)』
  • 김지영, 「숙종·영조 대 어진도사와 봉안처소 확대에 대한 고찰」, 『규장각』 27, 2004.
  • 윤진영, 「장서각 소장 『어진도사사실』의 정조~철종 대 어진도사」, 『장서각』 11,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