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가(釋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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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를 개창한 석가족의 성자 고타마 싯다르타의 종족 이름이자 석가모니(釋迦牟尼)의 줄임말.

개설

석가(釋迦)는 석가모니의 약칭으로, 석가족의 성자인 고타마 싯다르타를 가리킨다. 그는 기원전 560년경에 카필라성 교외의 룸비니 동산에서 슛도다나왕과 마야부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청년 시절에는 왕자로서 현세적인 쾌락에 탐닉했으나, 그 같은 생활에 만족하지 못하고 29세에 출가하여 35세에 깨달음을 얻었다. 그 뒤 갠지스강 중류에서부터 네팔에 이르는 지역을 돌아다니며 교화에 힘쓰다가, 80세의 나이로 쿠시나가라에서 입멸하였다.

내용 및 특징

석가모니는 석가와 모니가 합쳐진 말이다. 석가는 산스크리트어 ‘샤카(Śākya)’의 음역어로, 고대 인도의 종족 이름이다. 석가족은 오늘날의 네팔 남부 중앙에서부터 인도 국경 부근에 이르는 지역에 살았다. 모니는 산스크리트어 ‘무니(muni)’를 음역한 말로, 성자(聖者)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석가모니는 석가족의 성자라는 뜻인데, 일반적으로는 불교를 창시한 싯다르타를 가리킨다.

싯다르타는 기원전 560년경에 카필라성 교외의 룸비니 동산에서 슛도다나왕과 마야부인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싯다르타가 태어난 지 7일 만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 이모인 마하파자파티(Māhapajāpatī)에 의해 양육되었다. 왕자로서 어린 시절부터 좋은 환경과 훌륭한 스승 밑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모든 면에서 비범한 재능을 발휘하였다. 성장해서는 꼴리야족 선각왕의 딸 야쇼다라(Yaśodharā)와 결혼하여 아들 라훌라(Rāhula)를 낳았다.

그러나 싯다르타의 세속적인 행복은 생로병사(生老病死)라는 삶의 근본 문제를 의식하면서부터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결국 29세 때 모든 것을 버리고 구도자의 길에 들어섰다. 그는 먼저 남쪽 마가다국의 왕사성에 가서 그 당시 명성을 떨치고 있던 전통적인 요가 수행자 알라라 깔라마(Alāra Kālāma)를 만나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의 가르침을 받았다. 무소유처정이란 ‘스스로에게 속하는 것은 없다’는 뜻으로, 세간에 대한 모든 욕망을 버리는 경지를 말한다. 싯다르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스승의 가르침을 완전히 체득하였다. 스승으로부터 제자를 통솔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지만, 이 가르침은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 아니라고 여겨 그를 떠났다. 또 웃다까 라마뿟다(Uddaka Rāmaputta)를 찾아가, 표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삼매의 경지인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의 가르침을 받았으나, 역시 만족하지 못하고 떠나갔다.

그 뒤 싯다르타는 마가다국 네란자라(Nerañjarā)강 근처 고행림(苦行林)에서 금욕적인 고행을 시작하였다. 그 당시 바라문들 사이에서는 금욕 수행이 초월적인 힘을 얻는 수단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6년 동안의 철저한 금욕 수행에도 불구하고 원하는 깨달음을 얻을 수 없었다. 결국 고행을 중단한 싯다르타는 극도로 쇠약해진 몸을 이끌고 마을로 내려와 우유죽을 얻어먹었다. 체력을 회복한 그는 근처의 보리수 아래에 단정히 앉아 사유하였고, 새벽별을 보고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는 35세였다. 석가족 싯다르타가 부처가 되었으므로 그를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이라 부른다. 불교 경전에는 석가모니를 가리키는 칭호가 열 가지 더 등장하는데, 이를 여래십호(如來十號)라 한다. 여래(如來)·응공(應供)·정변지(正遍知)·명행족(明行足)·선서(善逝)·세간해(世間解)·무상사(無上士)·조어장부(調御丈夫)·천인사(天人師)·불세존(佛世尊) 등이 그것이다.

깨달음을 얻은 석가모니는 얼마 동안 보리수 아래를 떠나지 않고 해탈의 즐거움을 맛보았다. 하지만 곧바로, 인생의 진실을 모르는 중생들에게 자신이 깨달은 진리를 어떻게 이해시켜 구제할 것인지를 생각하였다. 이때부터 석가모니는 입멸하기 전까지 45년 동안 교화의 여정을 걷게 된다. 최초의 설법은 바라나시의 녹야원(鹿野苑)에서 수행하고 있던 아약교진여(阿若橋陳如) 등 다섯 명의 수행자에게 베풀었다. 법의 수레바퀴를 처음으로 굴렸다고 하여 이때의 설법을 ‘초전법륜(初轉法輪)’이라 부른다. 석가모니는 다섯 수행자에게 욕락(欲樂)과 고행(苦行)의 두 극단을 버리고 중도(中道)를 취하라고 가르쳤다. 괴로움의 원인은 집착에 있으며 집착을 없애려면 중도의 길을 가야 한다는 사성제(四聖諦)의 법문을 통해 그들을 깨우쳐 진리에 눈뜨게 하였다. 그들이 불교에 귀의함으로써 최초의 출가(出家) 제자인 비구가 되었고, 마침내 불(佛)·법(法)·승(僧)의 삼보(三寶)가 이루어졌다.

이때 바라나시에 살던 야사(Yasa)라는 청년이 석가모니의 설법을 듣고 출가하여 제자가 되었는데, 그의 부모와 아내도 설법을 듣고 재가 신도가 되었다. 그에 따라 남자 신자인 우바새(優婆塞)와 여자 신자인 우바이(優婆夷)가 처음으로 생겨났고, 이로써 출가자인 비구와 비구니, 재가자인 우바새와 우바이의 사부대중(四部大衆)이 갖추어졌다. 야사의 가족이 귀의한 뒤 그의 친구 50여 명도 감화를 받아 석가모니의 제자가 되었다.

석가모니는 그 당시 인도 문화의 중심지인 마가다국의 왕사성에서 중생을 교화하였다. 우루벨라의 병장촌(兵將村)에서는 불을 숭배하던 가섭 삼형제를 교화시켜 제자로 삼았는데, 가섭을 따르던 1,000여 명도 모두 석가모니의 제자가 되었다. 또 마가다 국왕과 왕실의 권속들도 재가 신자가 되었는데, 이들은 죽림정사(竹林精舍)를 지어 바치기도 하였다. 이로부터 불교는 왕사성을 중심으로 그 교세가 크게 확장되어 갔다. 그 뒤 석가모니는 고향 카필라성으로 돌아가 부왕을 비롯한 많은 친척과 그곳 사람들을 교화하고, 아우 난다와 아들 라훌라를 출가시켰다. 이때 아난과 데바다타, 아누룻다 등 사촌 동생과 적지 않은 석가족 사람들도 불제자가 되었다. 석가모니는 다시 코살라국의 수도인 사위성으로 가 파세나짓(Pasenaji)왕과 그 비(妃) 말리(Mali)부인을 교화하여 불교에 귀의시켰다. 그뿐 아니라 큰 부자인 수달다(須達多)로부터 기원정사(祇園精舍)를 보시 받아 이곳을 중심으로 널리 가르침을 폈다.

이처럼 석가모니는 왕사성과 사위성, 카필라를 왕래하며 직접 설법을 베풀었으며, 바라나시와 바이샬리, 코삼비 등에서도 중생을 교화하였다. 석가모니의 가르침은 제자들에 의해 전파되어 그 당시에 이미 동쪽으로는 갠지스강 하류까지 전해졌고, 서쪽으로는 지금의 뭄바이 북방인 아라비아해 연안까지 전파되었다고 한다.

45년 동안 중인도 각지를 다니며 교화에 힘쓰던 석가모니는 어느 날 자신의 수명이 다했음을 자각하고 고향을 향해 최후의 유행을 떠났다. 도중에 마지막 제자 춘다의 공양을 받고 식중독에 걸린 그는 힘겹게 사라쌍수(沙羅雙樹)에 이르렀다. 온몸의 통증으로 괴로워하던 석가모니는 찾아온 대중에게 설법을 베푼 뒤 자리를 펴고 오른쪽으로 누워 발과 발을 포개었다. 그의 입멸을 직감한 제자들이 슬퍼하자, "한탄하거나 슬퍼하지 말라. 일찍부터 가르쳐 준 바와 같이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나 친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헤어지지 않을 수 없다. 태어난 것은 반드시 죽는 법이니 죽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부질없다. 그리고 나는 이제 노쇠해졌다. 벌써 여든 살이다. 비유하자면 낡아 빠진 수레가 간신히 움직이는 것처럼 내 몸도 겨우 움직이고 있다. 아난다여! 자신을 등불로 삼고 의지처로 삼아라. 다른 사람에게 의지해서는 안 된다."라는 유훈을 남기고 입멸하였다.

참고문헌

  • 교양교재편찬위원회 편, 『불교학개론』, 동국대학교출판부, 1998.
  • 대한불교조계종 교육원 부처님의 생애 편찬위원회, 『부처님의 생애』, 조계종출판사, 2010.
  • 中村元·奈良康明·佐藤良純 [共]著, 김지견 역, 『불타의 세계』, 김영사, 2005.
  • 와타나베 쇼코 지음, 법정 옮김, 『불타 석가모니』, 샘터사,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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