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과수조(同科收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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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면적과 관계없이 동일한 양의 결부로 판정되면, 같은 액수의 전세를 수취하는 방법.

개설

조선에서는 토지의 절대 면적을 측량하는 것이 아니라, 수확량을 중심으로 토지의 등급을 나누고 이에 따라 다른 기준으로 면적을 측량하며 이를 결부(結負) 단위로 표시하는 결부법(結負法)을 시행하였다. 따라서 각 토지의 등급에 상관없이 동일한 결부에서는 동일한 전세(田稅)를 수취하도록 하였는데, 이러한 수취 원칙이 바로 동과수조(同科收租)였다(『세종실록』 26년 6월 6일). 조선은 왕조 기간 내내 결부법을 공식적인 토지 측량 방법으로 사용하였고, 이에 따라 전세 수취에서도 동과수취의 원칙이 조선의 전 기간에 걸쳐 관철되었다.

내용 및 특징

생산성을 기준으로 토지를 몇 등급의 전품(田品)으로 나누고 각 등급마다 다른 기준으로 면적을 산출하는 결부법(結負法), 그리고 결부법에 의해 동일한 면적으로 파악된 토지에 대해서는 같은 액수의 전조(田租)를 수취하는 동과수조는 조선의 특징적인 재원 수취 방식이었다. 세종대 공법이 도입된 이후 6등급으로 전품판정 기준이 세분화되었지만, 동과수조의 원칙은 그 이전과 동일하게 적용되었다.

이러한 결부제에 입각한 토지 파악과 동과수조에 의한 전조 수취 방식은 재정 운영에서 몇 가지의 편리한 점을 가지고 있었다. 우선 토지의 실제 면적과는 상관없이 결수에 해당 연도의 풍흉을 고려한 변수를 곱하면 바로 예상 세액을 산출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또한 각사의 위전(位田)이나 관원의 과전(科田) 등을 분급할 때에도 5결을 묶은 자정(子丁) 단위로 분급할 수 있는 편리함이 있었다. 결 단위에 이미 토지의 비옥도가 고려되었으므로, 국가에서는 이들 결 단위를 동일한 경제적 가치로 평가·운용하는 것이 가능하였다. 요컨대 국가에서 수취와 재정 부문에 투여해야 할 막대한 행정적 노력을 절약하는 효과를 가진 제도였던 것이다.

반면, 동과수조의 방식에는 몇 가지 한계점도 있다. 우선 전품 판정 당시에 적절한 등급이 부여되지 않으면 해당 토지는 부당한 세액을 계속 부담하게 된다는 큰 단점이 있었다. 본래 편차가 큰 토지 생산성을 국가에서 정한 3등급 혹은 6등급으로 획일화하는 것은 근본적인 문제점을 내포하였다. 또한 시간의 경과로 토지의 생산성이 바뀌었는데도 양전이 제때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실제의 토지 생산성을 반영하지 못한 세액을 부과할 수밖에 없었다. 절대 면적을 측량한다면 단위 필지에 대한 기록을 매번 새롭게 바꿀 필요가 없었겠지만, 생산성을 고려하여 결부를 결정하게 되면 매번 단위 필지들의 결부의 절대량이 바뀌고, 이에 따라 전체 자정의 배열도 바뀌어야 하는 문제점도 발생하였다. 그럴 경우 실제 양안에서는 동일한 자정이라 하더라도 자정 내의 경작지와 소유주는 바뀔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았다.

이런 제도적 약점 때문에 세종대에는 공법 논의 과정에서 절대 면적을 파악하는 경무법(頃畝法)이 고려되기도 하였다. 후일에 유형원과 같은 학자들 역시 경무법에 의거한 양전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결부제와 동과수조가 가지는 재정 운영의 편리함 때문에 조선왕조 전 기간에 걸쳐 전세 수취의 원칙으로 기능하였다.

변천

동과수조의 원칙은 조선시대 내내 관철되었으나, 그 시행의 찬반 여부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검토된 시기가 있었다. 바로 세종 연간 공법 시행의 논의 과정에서였다. 즉, 앞서 언급한 것처럼 국가에서 제시한 몇 개의 등급으로 토지의 생산성을 모두 반영하는 것이 어려우니 절대 면적을 측정하는 경무법에 의해 토지를 측량하자는 의견이 제시되었다. 그러나 당시 신료들의 대부분은 결부법이 재정 운영에 유리한 제도이므로 동과수조의 원칙을 지킬 것을 주장하였고, 세종도 이러한 의견에 동의하였다. 그 결과 1444년(세종 26) 공법의 시행안이 발표될 때에도 동과수조의 원칙을 고수하였으며, 이는 이후 조선시대 내내 동일하게 적용되었다(『세종실록』 26년 11월 13일).

토지의 생산성을 반영하여 토지를 측량하고, 이를 근거로 같은 측정치의 단위 면적에 동일한 세액을 부과하는 방법은 조선에서 운용된 독특한 제도였다. 이러한 제도로 방대한 양의 토지를 효과적으로 관리하여 재정을 운영할 수 있었다.

그러나 조선후기 토지의 소유권이 발달하고, 전체적인 토지 생산성이 늘어난 상황에서 국가가 이에 긴밀하게 대응하지 못함으로써 결부제와 동과수조의 원칙은 오히려 국가의 재정 운영에 큰 방해 요소로 작용하기도 하였다. 대한제국기 광무양전 시기에도 결부제를 통해 측량한 것은 이러한 원칙이 조선의 재정 운영에서 뿌리 깊은 요소임을 잘 보여 주는 것이라 하겠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속대전(續大典)』
  • 『반계수록(磻溪隧錄)』
  • 강제훈, 『조선 초기 전세 제도 연구: 답험법에서 공법 세제로의 전환』,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2002.
  • 이철성, 『17·18세기 전정 운영론과 전세 제도 연구』, 선인,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