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지명(墓誌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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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사람의 인적 사항과 일생 동안의 행적을 개괄하고 평가하는 글 또는 그 글을 비석에 새긴 것.

개설

무덤에 사용하는 비를 묘비라고 한다. 묘비에는 지상에 세우는 신도비(神道碑)·묘갈(墓碣)·묘표(墓表)·신도표(神道表) 등과 지하에 묻는 묘지명(墓誌銘) 등이 있다. 묘지명은 대개 정방형의 두 돌에 나누어 새긴 뒤 포개어 묘광(墓壙)에 묻었는데, 아랫돌에는 지(誌)와 명(銘)을 새기고 윗돌에는 표제를 새겼다. 장지(葬誌), 매명(埋銘), 광지(壙誌), 광명(壙銘)이라고도 한다.

내용 및 특징

묘지명은 대개 죽은 이의 성씨·본관·일생 등을 산문으로 나타낸 지(誌)와, 앞에 산문으로 지은 내용을 운문으로 개괄한 명(銘)의 두 부분으로 이루어진다. 지와 명 가운데 한쪽이 없는 경우도 있다. 지와 명 앞에 서(序)를 두는 것은 묘지명병서(墓誌銘幷序)라고 한다.

삼국시대의 묘지명은 매우 드물다. 408년(백제 전지왕 4)의 「덕흥리고분묘지(德興里古墳墓誌)」, 525년(백제 성왕 3)의 「무령왕묘지(武寧王墓誌)」, 529년의 「무령왕비묘지(武寧王妃墓誌)」 등이 이른 시기의 것들인데, 지은이는 알 수 없다. 또한 낙랑의 금석문으로 「위고항주치중진양남왕군묘지명(魏故恒州治中晉陽男王君墓誌銘)」 즉 「왕정묘지명(王禎墓誌銘)」 등 4편이 있다. 그밖에 고구려의 묘지명으로는 천남생(泉男生)과 고자(高慈)의 묘지명을 비롯해 7편 정도가 전하고, 백제사람 부여융(扶餘隆)과 흑치상지(黑齒常之)의 묘지명이 전하지만, 모두 중국에서 만들어져서 중국에 전한다.

고려시대의 묘지명 가운데 실물이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것은 1024년(고려 현종 15)에 무명씨가 지은 「채인범묘지명(蔡仁範墓誌銘)」이다. 묘주(墓主)는 중국인으로, 고려에 귀화한 인물이다. 그에 비해 지은이가 명시되어 있는 가장 오래된 묘지명은 이성미(李成美)가 지은 「이자연묘지명(李子淵墓誌銘)」이다. 이 묘지명에는 입성 ‘설(屑)’을 운자로 사용한 명(銘)이 붙어 있다.

묘지명은 묘역의 표지와 점유, 가계(家系)의 지난 일을 소급하여 추후에 인정하는 일 등에 유효하다. 조선시대 후기의 실학자인 이규경(李圭景)은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서, 후세에 묘를 잃어버렸을 때 묘지명이 발견되면 선영을 찾을 수 있다고 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도 그와 관련된 기록이 나온다.

변천

생전에 자신의 묘지명을 직접 지은 경우도 있다. 고려시대 중엽에 김훤(金晅)이 묘지명을 스스로 지은 이후 조선시대에는 이황(李滉)과 정약용(丁若鏞) 등 많은 지식인들이 자신의 묘지명을 직접 지었다. 또한 일찍 세상을 떠난 자식이나 여성을 위한 묘지명도 작성되었는데, 특히 조선시대에는 문임(文任)이 공주의 묘지명을 지었다(『세종실록』 6년 3월 6일).

한편, 민간에서는 하급 무반(武班)이나 벼슬길에 오르지 못한 잔반(殘班), 중인이나 서얼 계층을 위한 묘지명도 작성되었을 것이다. 상인이나 공인을 위해서도 간단한 내력을 기술한 묘지명이 작성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참고문헌

  • 김용선, 『고려묘지명집성』, 한림대학교출판부, 2006.
  • 심경호, 『한문산문의 미학』(수정증보), 고려대학교출판부, 2012.
  • 심경호, 「朝鮮時代 墓道文字의 歷史的 特性」, 『Journal of Koren Culture』Vol.15,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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