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무갈보살(曇無竭普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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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에 머물며 설법을 하는 보살.

개설

담무갈보살(曇無竭普薩)은 법기보살이라고도 하며, 『화엄경』에 의하면 금강산에 머물면서 12,000의 보살을 거느리고 설법을 한다고 한다. 불교의 주요 경전인 『화엄경』에 근거를 둔 담무갈보살 설화는 담무갈보살 신앙 또는 금강산 신앙으로 발전하였고, 특히 원 간섭기에 크게 유행하였다. 금강산 신앙은 고려만이 아닌 이웃한 원나라에도 영향을 미쳐, 당시 금강산은 동아시아의 불교 성지로 인식되었다.

내용 및 특징

담무갈(曇無竭)은 산스크리트어 ‘다르모가타(Dharmogata)’의 음역으로, 법(法)을 일으킨다는 뜻이다. 법성(法性), 법용(法勇), 또는 법상(法尙)을 의미하는데, 이것을 법기(法起)라고도 한다. 따라서 담무갈보살은 법기보살(法起菩薩)의 음역이다. 408~429년 불타발타라가 번역한 『육십화엄경(六十華嚴經)』에서 "현재 지달(枳怛)에서 담무갈보살이 12,000의 보살을 권속으로 하여 항상 설법을 한다."고 하였다. 지달이란 산스크리트어로 용출(湧出)함을 뜻하는 말로 금강산의 상(狀)을 가리킨다고 한다. 그래서 담무갈보살은 금강산에 머물면서 12,000의 보살을 거느리며 설법을 한다는 이야기가 성립된다.

금강산의 명칭은 『육십화엄경』보다 조금 후대의 경전으로 695~704년 실차난타가 번역한 『팔십화엄경(八十華嚴經)』에 등장하는데, "바다 가운데에 금강산이 있는데 옛적부터 보살들이 그곳에 머물렀다. 지금은 법기보살이 거처하며 12,000여 권속(眷屬)과 함께 머물며 항상 설법을 한다."고 하였다.

‘금강’이란 금강석을 말하는 것으로, 인도 신화에서는 폭풍의 신인 인드라가 지니고 있던 강력한 무기인 바즈라(vajra)를 뜻한다. 금강석은 다이아몬드로서 더 이상 쪼깨지지 않는 가장 견고한 금속이다. 불교에서는 이 금강석으로 번뇌와 무명을 퇴치한다고 한다. 아무리 두터운 번뇌와 무명도 단번에 퇴치해 버리는 지혜의 상징이 금강인 것이다. 초기 반야계의 대표적인 경전도 그 이름을 『금강경(金剛經)』으로 칭하고 있다. 금강산의 이름은 불교 경전인 『금강경』에서 따온 것으로 반야의 속성인 굳셈, 날카로움, 밝음을 상징한다.

담무갈보살(법기보살)이 설법하고 있다는 금강산의 위치를 명확히 제시하고 있는 서책은 중국 당나라 때 승려인 징관(澄觀)의 『화엄경소(華嚴經疏)』이다. 그에 의하면 "동해의 동쪽에 금강이라는 산이 있다. 전체가 금은 아니지만 위아래 사방으로부터 산간에 이르기까지 흐르는 물과 모래 속에 금이 있다. 멀리서 바라보면 전체가 곧 금이라 할 만하다. 또 해동(海東) 사람들은 예로부터 서로 전하기를 이 산에 왕왕 성인(聖人)이 출현한다."고 하였다. 담무갈보살을 중심으로 한 이와 같은 이야기는 자연히 담무갈보살 신앙을 낳았고, 이것이 실제로 금강산이 있는 한국 땅에서 크게 유행할 수 있었다. 또한 금강산이 담무갈보살이 주처(主處)하는 성지(聖地)가 되면서 담무갈보살 신앙은 곧 금강산 신앙을 의미하게 되었다.

변천

(1) 고려시대의 금강산 신앙

『화엄경』과 『화엄경소』 등에 근거하여, 담무갈보살이 동북쪽의 금강산에서 12,000의 권속을 데리고 설법하고 있다는 금강산 신앙(법기보살 신앙)이 한반도에 들어온 것은 8세기 이후였을 것으로 본다. 이 신앙이 크게 유행한 것은 고려시대 원 간섭기였다. 강원도 고성군에 위치한 금강산은 그 이름이 『화엄경』에서 유래하였을 뿐만 아니라 지리적으로도 중국의 동북쪽에 위치해 있으며, 실제로 12,000이라는 봉우리의 수가 담무갈보살이 거느리는 12,000의 권속에 대응한다. 고려인들은 불교 경전 속에 등장하는 금강산을 실제로 소유했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금강산 신앙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또한 불교가 국교였던 시대인 만큼 사회적 공감대 형성도 쉬워 더욱 크게 유행한 것으로 보인다.

고려후기의 문신인 민지(閔漬)는 『금강산유점사사적기』에서, "신라의 옛 기록에 의하면 의상 법사께서 처음 오대산에 드셨다가 금강산에 이르자 담무갈보살이 현신하여 법사에게 말하기를 ‘오대산은 수행이 있는 사람들만 세간의 티끌을 벗어날 수 있는 땅이다’라고 이르셨다."하였다. 고려에서 금강산은 담무갈보살의 주처라는 확고한 신앙이 자리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고려 원 간섭기의 학자이자 문신인 이곡(李穀)은 「장안사비(長安寺碑)」에서, "『화엄경』에 이르기를 동북 바다 가운데에 금강산이 있는데, 담무갈보살이 12,000의 보살과 함께 항상 반야(般若)를 강설하고 있다."고 하였다. 이곡은 또 금강산 신앙의 유행으로 인한 그 지역의 잦은 불사를 "천자의 사신이 향과 폐백을 가져오는 것이 길에 늘어섰고, 사방의 사녀(士女)들이 천리길을 멀다 하지 아니하면서 소에 싣고 말에 싣고 등에 지고 머리에 이고 와 부처님과 스님에게 공양하는 자가 발꿈치가 서로 닿았다."고 서술하였다.

이같은 기록들은 고려후기 지식층이나 일반 서민들을 막론하고 사회 전반에 걸쳐 금강산 보살신앙이 크게 유행했음을 보여준다.

(2) 고려말 조선초 금강산 신앙의 파급

원 간섭기에 유행한 금강산 보살신앙은 고려에 국한되지 않고 이웃한 원나라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먼저 고려 공녀(貢女) 출신으로 원 순제(順帝)의 제2황후가 된 기황후(奇皇后)가 금강산장안사(長安寺)에 보시를 한 것을 들 수 있다. 당시 기황후가 금강산 장안사에 보시할 때 "복을 빌어 위에 보답하고자 한다면 금강산 장안사만 한 곳이 없다."고 한 이야기는 당시의 금강산 신앙의 유행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이전부터 원 황실과 관계를 맺고 있던 장안사가 담무갈보살이 상주하는 금강산에 소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기황후 역시 황제와 아들의 복을 비는 불사를 펼치기에 가장 적합한 사원으로 장안사를 꼽은 것이다.

원나라 때 고승인 몽산덕이(夢山德異)의 제자 철산소경(鐵山昭瓊)이 1304년(고려 충렬왕 30) 고려 불교계의 초청으로 고려에 왔을 때, 그가 방문한 장소 중 하나가 금강산이었다. 이때 철산소경을 금강산으로 안내한 민지는 사적기에 금강산을 담무갈보살의 주처라고 기록했다. 민지는 철산의 금강산 순례가 담무갈보살 신앙에 의해서 시행되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또한 고려말의 왕사였던 나옹혜근(懶翁惠勤)의 스승인 원나라의 승려 지공(指空)이 1326년(고려 충숙왕 13) 고려를 방문했을 때, 지공은 개경을 거쳐 바로 금강산에 들어가 한 달 동안 유력하였다. 당시 지공이 찾은 곳은 금강산의 법기도량(法起道場) 즉 유점사였다고 한다. 도량의 이름을 법기도량이라고 한 데에서 지공이 법기보살(담무갈보살) 신앙의 발로에서 금강산을 참례하였음을 알려주고 있다.

금강산 신앙은 중국에서도 전승되고 있었는데, 중국에서는 ‘고려에 태어나 친히 금강산을 보는 것이 소원이다.’라는 속담이 있었다고 한다(『태종실록』 4년 9월 21일). 이 때문에 조선시대에는 조선에 파견되는 명의 사신들이 금강산 방문을 청하곤 했는데, 때때로 황제가 금강산에 번을 달라고 명하기도 했다(『성종실록』 1년 5월 9일).

조선시대에는 세조가 직접 금강산에 올라 담무감보살에게 참배를 했다. 세조는 일본 국왕에게 보낸 친서에서 "『화엄경』에 담무갈보살이 12,000 권속과 더불어 상시로 머물면서 설법한다는 절이 바로 금강산"이라며 "요즘 내가 지방을 순행하고 인하여 이 산에 나아가서 삼보(三寶)에 첨례(瞻禮)하였는데 …… 명양승회(明揚勝會)를 열자 위와 같은 여러 가지 기이한 상서가 거듭 나타나고, 또 담무갈보살이 무수한 소상(小相)을 나타내었다가 다시 대상(大相)을 나타내어 그 길이가 하늘에 닿았다."고 밝혔다(『세조실록』 12년 윤3월 28일). 세조의 이 같은 전언은 조선시대에도 금강산 신앙이 여전히 생명력을 유지하며 전승되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참고문헌

  • 윤기엽, 『고려후기의 불교』, 일조각, 2012.
  • 한국불교연구원, 『북한의 사찰』, 일지사, 1991.
  • 허흥식, 『고려로 옮긴 인도의 등불』, 일조각,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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