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성(縣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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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두만강 중하류의 경원 맞은편에 여진족이 거주한 성.

개설

현성은 관방시설로 두만강(豆滿江)과 훈춘하(琿春河) 사이에 있다. 이 성이 처음 축조된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발해대에 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전기에 여진인(女眞人)이 거주하였고, 이들은 조선의 번호(藩胡)가 되었다. 그러나 현성의 번호는 1600년대 초반부터 지속적으로 이루어진 포점태(布占泰)의 침입으로부터 벗어나 누르하치([奴兒哈赤, 老乙加赤], nurhaci)에게 귀속되었다.

자연 환경

현성의 북동쪽에 현재의 훈춘(琿春) 시가지가 위치한다. 서쪽으로 두만강, 동쪽으로 훈춘하가 흘러 성의 남쪽 약 10㎞ 지점에서 합류한 뒤, 동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현성은 두만강과 훈춘하의 사이에 위치하기 때문에 충적평원을 이루고 있어 현재 농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위치 비정

현성의 위치를 정확히 알기는 어렵다. 하지만 『조선왕조실록』의 여러 기록을 통해 추정할 수 있다. 먼저,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두만강 하류에 (경원의) 회질가탄(會叱家灘)이 있는데 강을 건너 10리(약 4㎞) 되는 넓은 들 가운데에 큰 성이 있으니, 곧 현성이다. 안에 6개의 우물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세종실록』「지리지」 함길도 경원도호부]. 여기에 『선조실록』에 의하면 후춘강과 두만강의 사이에 있는데 진(鎭)을 설치하고 토성(土城)을 만들었다. 현성은 직경 20리(약 8㎞) 정도로, 호인의 집이 가득 찼다고 하였다(『선조실록』 36년 8월 24일).

위의 두 기사를 검토하면 현성은 경원 지역에서 두만강을 건너 10리 되는 들 가운데 위치한 큰 성이라는 것과 후춘강(현 훈춘하) 사이에 있는 토성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기록을 토대로 두만강과 훈춘하 사이의 성을 찾으면 비우성(斐優城)과 온특혁부성(溫特赫部城)을 발견할 수 있다. 이 두 곳은 남과 북으로 담장을 사이에 두고 있어 ‘자매성(姉妹城)’으로 부른다. 두 성은 모두 흙으로 축조하였고, 충적평원의 가운데 있기 때문에 주변에서 한 번에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두 성의 둘레가 비우성 2,023m, 온특혁부성 2,269m으로 합하면 총 4㎞를 넘기 때문에 현성의 직경이 20리 정도라는 기록과도 얼추 일치한다. 따라서 이 두 성 가운데 한 곳을 혹은, 두 곳을 포함하여 현성이라고 기록하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특히, 『청태조실록』에서도 이곳을 비유성(蜚悠城)이라고 기록하였기 때문에 둘 가운데 같은 음가인 비우성이 현성일 가능성이 더 높다.

현재 이곳은 중국 길림성(吉林省) 훈춘시(琿春市) 삼가자향(三家子鄕) 고성촌(古城村) 지역이고, 온특혁부성에는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형성 및 변천

현성이라는 지명이 처음 등장하는 시기는 1437년 8월 7일이다. 이때 향화한 여진인 중추원(中樞院) 부사(副使)은아리(殷阿里)가 동북면(東北面) 일대에 거주하던 여진인 추장들이 관하인(管下人)을 거느리고 이주한 것을 보고하였다. 특히, 자신의 관하 300여 호가 전에 현성평(縣城平)에 살다가 1432년에 함흥(咸興)·정평(定平) 등지로 옮겼다고 보고한 내용을 통해 알 수 있다(『세종실록』 19년 8월 7일). 그러나 이것은 사료에 처음 등장한 시기이고, 이곳이 형성된 것은 고구려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현성이 위치한 훈춘 지역은 고구려 동북부의 요충지인 책성(柵城)이 있던 곳이었다. 따라서 고구려대부터 현성 일대에 성이 축조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현성이 처음 축조된 시기는 발해 시기일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발해의 5경 중 하나인 동경용원부(東京龍原府)가 훈춘에 있었다. 그리고 그 성터로 비정되는 팔련성(八連城)이 현성의 동북쪽 약 3㎞ 지점에 위치하기 때문에 이와도 관련성이 있다고 보인다. 특히, 현성의 바로 남쪽에 붙어 있는 온특혁부성은 이전에 요금시대의 고성(古城)으로 비정하였다. 그러나 최근 성의 양식과 지표조사에서 발견된 토기, 기와 조각 등에서 발해의 특징이 보이기 때문에 발해대에 사용되어 요금대에도 이용한 것으로 보고 있다.

비우성은 요금대의 고성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성 내부에서 동(銅)으로 만든 10여 개의 도장이 출토되었는데, 제작 시기는 금대(金代) 말기와 동하국(東夏國)으로 밝혀졌다. 따라서 이 성은 최소한 금대 말기와 동하국에서 사용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후 원대(元代)에 해관만호부(奚官萬戶府)의 치소가 설치되었다.

원말 명초의 혼란기에 송화강(松花江)과 목단강(牡丹江)의 합류처 의란(依蘭) 지역에 거주하던 동맹가첩목아(童猛哥帖木兒)의 알타리(斡朶里)와 아합출(阿合出)의 화아아(火兒阿)가 이주하여 거주하였고, 이들은 다시 각각 함경도 회령 일대와 요동(遼東)의 개원(開原) 지역으로 이주한 뒤, 관하인들이 거주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조선과 아합출의 관계가 틀어졌고, 아합출 등은 현성 등지에 거주하다가 조선으로 이주한 자신의 관하인을 송환해 달라고 영락제(永樂帝)에게 부탁하였다(『태종실록』 9년 1월 21일).

한편, 세종대 이후로 현성에 관한 기록이 나오지 않다가 선조대에 접어들며 빈번하게 발견된다. 당시 세력을 확장하고 있던 오랍(烏拉)의 포점태가 이 지역으로 진출하였기 때문이다. 1603년 8월부터 포점태는 조선과 번호(藩胡)를 공략하였다. 포점태군은 경원 건너편의 부여지(夫汝只)에 머물며 같은 해 12월에 현성 문밖에 둔(屯)을 쳤다(『선조실록』 36년 12월 28일). 이를 통하여 현성이 두만강 유역 여진인에게 중요한 방어 거점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포점태는 현성을 함락시키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포점태는 1605년 3월에도 동관진(潼關鎭) 등 6진 지역과 두만강 유역의 번호를 공격하였다. 이에 함경북도병마절도사(咸鏡北道兵馬節度使)김종득은 포점태군에 대한 보복을 주장하였다. 김종득은 같은 해 5월에 포점태군이 주둔한 건가퇴(件加退)를 공격하였으나, 대패하여 포점태가 주도권을 차지하였다. 이를 계기로 그는 조선에 실직(實職)과 직첩(職牒)을 받아 냈다. 포점태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현성의 번호를 공격하였다(『선조실록』 39년 5월 1일).

현성의 번호는 포점태군에게 함락되지 않았지만, 그 주변 마을을 약탈당하며 어려운 처지에 놓였다(『선조실록』 39년 7월 7일)(『선조실록』 39년 7월 8일). 조선도 현성의 번호가 사라지면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건가퇴 전투 이후 포점태군과 다시 싸울 수 없었기에 방관하고 있었다(『선조실록』 39년 9월 10일)(『선조실록』 40년 1월 6일). 따라서 현성의 번호는 자신들을 지켜 줄 수 있는 것은 누르하치밖에 없다고 판단하였다. 즉, 1607년(선조 40) 1월에 현성의 추장 책목특흑(策穆特黑)은 누르하치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이에 누르하치는 군대를 보내 현성을 구원하였다(『선조실록』 40년 2월 6일)(『선조실록』 40년 2월 19일)(『선조실록』 40년 3월 17일).

누르하치가 현성의 번호를 구원하는 과정에서 포점태가 군대를 보내 조선의 종성 오갈암(烏碣巖)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이것이 ‘오갈암 전투’로 여기에서 승리한 누르하치는 포점태와의 사이에서 완벽한 주도권을 잡았다. 이를 계기로 그는 현성의 번호를 비롯하여 동해여진(東海女眞)을 복속하였고, 현성에 대한 소유권은 누르하치에게 넘어갔다. 그 이후 『조선왕조실록』에 더 이상 현성에 대한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참고문헌

  •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 『청실록(淸實錄)』
  • 『만주실록(滿洲實錄)』
  • 김진광, 『북국발해탐험』, 박문사, 2012.
  • 박정민, 『조선시대 여진인 내조 연구』, 경인문화사, 2015.
  • 姜龍範·劉子敏, 『明代中朝關係史』, 黑龍江朝鮮民族出版社, 1999.
  • 吉林省文物志編纂委員會, 『琿春縣文物志』, 吉林省延邊新華印刷廳, 1984.
  • 孫乃民 外, 『吉林通史』 2, 吉林人民出版社, 2008.
  • 양시은, 「연변 지역 고구려유적의 현황과 과제」, 『동북아역사논총』 38,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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