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율현(殷栗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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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도 서북부에 있으며 동쪽으로 안악, 남동쪽으로 신천, 서쪽으로 송화, 북쪽으로 황해와 대동강 하구에 접하는 위치에 설치되어 주민들을 관할하던 관청이자 행정구역.

개설

고려 때부터 은율현(殷栗縣)이라 불렸다. 태종 때에 풍천군과 합하여 풍은군(豊殷郡)이 되었으나 1415년(태종 15)에 다시 현으로 독립하였다. 이후 여러 차례 폐지된 적도 있었으나 곧 복구되어 1895년(고종 32)에 은율군이 될 때까지 강역이나 관원 직제상 큰 변화 없이 유지되었다. 경내에 있는 구월산성(九月山城)은 은율은 물론 주변의 안악, 문화, 장련의 주민들에게도 유사시 피난처로 인식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삼국시대에는 고구려 땅이었으며 율구(栗口) 혹은 율천(栗川)이라 불렸다. 통일신라시대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양악군(楊岳郡)의 속현이 되었다. 781년(신라 선덕왕 2) 이후 패강진(浿江鎭)에 속하였다. 고려 건국 후 은율현이 되었으며, 1018년(고려 현종 9)에 풍주(豐州)의 속현이 되었다. 1269년(고려 원종 10)에 원나라가 동녕부(東寧府)를 설치하였을 때 이에 속하였다가 1278년(고려 충렬왕 4)에 고려에 환속되었다. 조선 건국 후에는 1396년(태조 5)부터 감무가 다스렸고, 1414년(태종 14)에 풍천군과 합하여 풍은군이라 하였다(『태종실록』 14년 8월 21일). 1415년(태종 15)에 다시 현으로 독립되어 현감이 부임하였다(『태종실록』 15년 3월 25일).

조직 및 역할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의하면 종6품 현감이 보임되었으며, 좌수 1명, 별감 3명, 군관 120명, 감영 소속 군관 100명, 아전 25명, 지인 15명, 사령 16명, 군뢰 2명, 관노 16명, 관비 30명이 있었다. 소속 병력은 시위군 5명, 진군(鎭軍) 36명, 선군(船軍) 106명이 있었다. 이 외에 중앙군영인 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 소속 정군과 보인들이 있었다.

경내에 구월산성이 있는데 1012년(고려 현종 3)에 거란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처음 축조된 궁올산성(弓兀山城)에서 비롯한 것이다. 조선후기에 후금의 침공에 대비하여 산성 중심 방어책을 강구하면서 피난처로서 중요성이 부각되어 산성이 수축되었다(『인조실록』 5년 7월 22일). 구월산성수성영장(九月山城守城營將)은 현감이 겸하였고 수성별장(守城別將) 1명이 있었다.

변천

1664년(현종 4)에 사노(私奴)들이 자기 주인을 살해하는 사건이 일어나(『현종실록』 5년 2월 12일) 읍이 폐지되었으나, 1670년(현종 11)에 복구되어 다시 현이 설치되었다. 원래 강상죄에 관련된 사건이 발생하면 읍격을 강등시키거나 폐지하는 기간이 10년인데 이때에는 흉년에 진휼을 베푸는 데 장애가 되어 주민들의 요청에 따라 기한이 차지 않았음에도 읍이 복구되었다(『현종실록』 11년 12월 28일).

1685년(숙종 11)부터 현감이 구월산성수성영장을 겸하였다. 『여지도서』에 의하면 1688년(숙종 14)에 민심을 어지럽힌다는 죄목으로 죽임을 당한 여환(呂還)의 처 원향(元香)의 태생 읍이라는 이유로 현이 폐지되고 문화현에 속하였으나, 곧 원향의 태생 읍이 아니라는 주민들의 정소(呈訴)가 받아들여져 1690년(숙종 16)에 읍격과 읍호가 복구되었다. 1895년에 전국에 23부제가 시행되자 해주부 은율군이 되었으며(『고종실록』 32년 5월 26일), 이듬해 13도제의 시행과 더불어 황해도 은율군이 되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황해도(黃海道) 은율현(殷栗縣)
  • 『여지도서(輿地圖書)』황해도(黃海道) 은율현(殷栗)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고승희, 「조선후기 황해도 內地 방어체계」, 『한국문화』38,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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