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교사(舟橋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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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때 선박, 교랑, 호남·호서 지방의 조운(漕運) 등에 관한 사무를 담당하던 관서.

개설

주교사는 정조가 1년에 한 번씩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인 현릉원을 참배할 때 참배 행렬이 한강을 건널 수 있도록 부교(浮橋)를 설치하는 업무를 전담하던 아문이다. 1789년(정조 13)에 설치하여 준천사와 합부하였다. 처음에는 왕의 행차 때 배다리 설치를 전담하였으나 점차 그 업무가 확대되어 선박과 교량에 관한 업무는 물론이고 호남과 호서 지방의 세곡 운반에 관한 사무까지 관장하였다.

주교사의 관원은 준천사의 관원이 겸임하였고 운영비는 영남별회곡(嶺南別會穀)과 호남·호서 지방의 세곡 운반 비용으로 충당하였다. 본래 주교사의 집주선이 세곡 운반을 전담하였으나, 기일을 넘기거나 과도한 운반 비용 부담으로 민폐가 발생하자 1882년(고종 19) 주교사의 집주선을 혁파하였다. 그리고 감생청(減省廳)은 별단(別單)을 통해 주교사를 혁파하고 업무는 금위영(禁衛營)이 담당하게 하였다.

1899년(고종 36) 고종이 신주(神主)를 능(陵)이 있는 곳으로 옮기기 위해 한강의 노량진을 건널 때 농상공부(農商工部)가 설치한 배다리를 이용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1789년 정조는 병선(兵船)과 방선(防船)을 살펴보도록 파견한 관원이 조사한 것을 비변사를 통해 보고받으면서 호서 지역의 배들이 민폐를 끼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후 뱃길을 군문(軍門)에서 주관하는 방안을 강구하게 하였다. 우의정김종수는 부교를 1년에 한 번 조성하는 것은 정해진 규례이고, 재력과 목재도 이미 준비되어 있으니 주관하는 아문을 주교사라 부르면서 준천사에 합부하고, 준천사의 유사당상이 겸직하여 관할하게 할 것을 제의하였다. 비변사는 3정승이 주교사의 도제조를 예겸(例兼)하게 하고, 준천사의 주관당상과 병조 판서·한성판윤·훈련대장·어영대장이 제조를 겸임하게 하자고 제안하였다. 그리고 주교사의 운영을 위해 영남별회곡 중 쌀 2천 석을 떼어 내어 비용으로 삼게 하였다. 왕이 강을 건널 때는 유도장신 중에서 별도의 주사대장을 임명하여 책임을 지게 하였다.

정조는 1년에 한 번씩 수원의 현릉원을 참배하였고, 한강을 건널 때는 용배를 사용하였으나 매우 불편했다. 처음에는 정조가 묘당에 배다리 제도를 개정할 것을 지시하였다. 그런데 보고된 세목(細目)이 정조의 뜻에 맞지 않았다. 정조는 한강을 건너기 편리한 배다리에 관해 직접 연구하였고, 묘당이 보고한 주교사의 세목을 논변하고 이어 어제문을 첫머리에 실어 『주교지남(舟橋指南)』을 완성했다. 정조는 배다리를 놓기에 가장 적합한 지형으로 한강의 노량진 부근을 지목하였고, 물의 넓이·배의 선택·배의 수효와 높이 등 배다리 설치에 관한 준비와 방법을 상세하고 정확하게 규명하였다.

조직 및 역할

주교사는 한강을 좀 더 적은 비용으로 편리하게 건너기 위한 배다리 설치를 전담하였다. 1791년(정조 15) 주교사 당상정민시는 주사(主事) 편제 방안을 제안하였다. 정조는 이를 토대로 금위중군이유경의 의견을 참고하여 주사 편제를 확정했다. 주교를 놓는 데에는 경강선(京江船) 수백 척과 격군(格軍) 천여 명이 필요했다. 당시 격군은 충분하였지만 경강선은 80여 척에 불과하였다. 이들을 묶어 군제(軍制)로 만들고, 감독하고 다스리기 위해 도성에 머무는 장수 중 적합한 인물을 주사대장으로 뽑아 전적으로 관할하고 집행하게 하였다.

점차 주교사는 담당 업무가 확대되어 배다리 설치뿐만 아니라 선박과 교량에 관한 업무, 호남과 호서 지방의 세곡 운반에 관한 사무 등까지 관장하였다.

변천

주교사는 호남과 호서 지역의 세곡 운반과 관련한 원칙을 정하였다. 선운(船運)은 1년에 두 번 있지만 먼 고을의 경우 선박의 상태와 사공들의 자질 등이 좋지 않아 두 번 운행하는 데 장애가 많았다. 그래서 주교사는 먼저 먼 고을의 것을 운반한 자는 다음에는 가까운 고을을 운행하게 하고 먼저 가까운 고을을 운행한 자는 다음에 먼 고을을 운행하게 하자는 뜻으로 정식(定式)을 만들었다.

1793년(정조 17) 주교사는 배다리 가설의 원활함과, 배를 모으는 과정에서 중간에 농간을 부려 뱃사람들이 받는 폐단이 심각한 현실을 직시하여 「주교절목」을 만들었다. 정조는 주교 제도를 통해 배를 찾아다니는 일을 영원히 혁파하고 경강(京江)의 큰 배들만으로 연결시켜 교량을 만들게 하였다. 그러므로 종래의 폐단은 완전히 사라지고 일은 간단해지며 공력과 비용도 줄어들었다.

그렇다고 주교사 뱃사람들의 작폐(作弊)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1799년 좌의정이병모는 호남의 세미(稅米)와 관련하여 주교사 뱃사람들이 저지르는 폐단을 금할 것을 주청하였다. 이러한 점은 당시의 암행어사계문(啓聞)에도 자주 나타난다. 주교사는 본래 조세를 운반하기 위해 설치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주교사가 배를 점검하고 수효를 나누어 조세를 운반하게 하였기 때문에 점차 주교사가 조세 운반에 관여하게 되었다.

1866년(고종 3) 병인양요가 발발했을 때 주교사의 장교와 병졸들은 전장에 나간 군병들에게 군량을 실어 날랐다. 이들은 여러 날을 노숙하기도 하였다. 이후 주교사에서는 전선(戰船)을 만들기도 하고, 파손된 전선을 수리하기도 했다. 1867년 의정부는 새로 만든 전선은 모두 주교사에 소속시키게 하고, 훈련도감·금위영·어영청이 통행세에 해당하는 문세(門稅)를 받아 전선을 고치게 하였다. 1871년 이양선이 강화도 부근에 나타나자 주교사는 군량 천 석은 물론이고 군사·무기 등을 운반했다.

실제의 주교선은 교배선(橋排船) 38척, 좌·우호위선(左·右衛護船) 12척, 난간선(欄干船) 240척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1882년 감생청은 감생별단에서 주교사를 혁파하고 금위영이 주교 업무를 담당하게 하였다. 주교당상은 일이 있을 때 해당 장신(將臣)으로 임명했다.

고종은 1899년 신주를 능소로 옮기기 위해 노량을 건너야 했다. 주교사가 이미 혁파되었기 때문에 농상공부가 배를 이어 만든 배다리를 이용했다.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