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양위(鷹揚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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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중앙군인 2군 6위 중 2군에 속한 응양군(鷹揚軍)의 별칭.

개설

고려의 중앙군인 2군 6위는 고려 말에 흔히 8위(衛)로 통칭되었는데, 이러한 경향에 따라 응양군(鷹揚軍)도 응양위(鷹揚衛)라고 일컬어졌다. 조선 건국 이후 응양위가 속한 8위는 태조이성계의 친위 부대인 의흥친군좌·우위(義興親軍左·右衛)와 더불어 10위를 구성하여 조선초기의 중앙군으로 기능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고려의 중앙군인 2군 6위 중 응양군과 용호군(龍虎軍)으로 이루어진 2군의 설치에 대해서는 『고려사(高麗史)』 백관지(百官志) 서반조(西班條)에 “목종 5년(1002) 육위(六位)의 직원들을 갖추어 두었다. 그 뒤에 응양군과 용호군의 2군을 두었는데, 2군은 6위의 상위(上位)에 있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고려사』, 현종(顯宗) 8년 11월조에는 “이원(李元)을 용호군 상장군겸호부상서(上將軍兼戶部尙書)에 임명했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따라서 2군은 1002년(고려 목종 5)에서 1017년(고려 현종 8) 사이의 어느 시기에 설치된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1010년(고려 현종 1)에 고려 국왕 현종은 거란의 침입을 당해 나주로까지 피난 다니면서 호위 병력의 부족으로 막심한 고충과 위기를 겪었다. 피난 당시 현종은 호위병이 없어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막심한 고생을 했던 것이다. 따라서 현종은 친위 병력을 강화할 필요성을 절감했을 것이고, 환궁 후 2군이 설치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응양군의 설치 목적은 전적으로 왕을 측근에서 경호·경비하기 위함이었다. 이와 같이 응양군과 용호군 등 2군은 왕을 측근에서 경호하는 친위부대들이었기 때문에 응양군과 용호군 소속의 상장군과 대장군은 근장(近仗) 상장군, 대장군으로, 장군들은 친종장군(親從將軍)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었다.

조직 및 담당 직무

『고려사』 백관지, 응양군조에는 응양군의 조직에 대하여 “응양군에는 1령(領)이 있었는데, 군(軍)에는 정3품의 상장군 1명, 종3품의 대장군 1명을 두었으며, 령(領: 한자 중복 삭제)에는 정4품의 장군(將軍) 1명, 정5품의 중랑장(中郞將) 2명, 정6품의 낭장(郎將) 2명, 정7품의 별장(別將) 2명, 정8품의 산원(散員) 3명, 정9품의 위(尉) 20명을 두었으며 또 대정(隊正) 40명을 두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공민왕 때에 장군을 호군(護軍)으로 고쳤는데 다른 위(衛)들에서도 이와 같다. 응양, 용호 2군의 상장군, 대장군은 근장 상장군, 대장군이라고 불렀으며, 장군은 친종장군이라고 불렀고, 중낭장 이하도 역시 근장이란 이름을 붙여서 불렀다. 또 응양군의 상장군으로서 군부전서(軍簿典書)를 겸임한 자를 반주(班主)라고 불렀다.

그런데 고려시대에는 정5품 중랑장부터 품외(品外) 대정까지의 군사를 특별히 부병(府兵)이라고 불렀으므로, 응양군은 상장군 1명, 대장군 1명, 장군 1명과 더불어 69명의 부병 군사를 거느린 군대였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1령은 ‘1천 명의 군사를 일컫는 단위’라고 하여 응양위가 1령이므로 1,000명의 군사가 있었다고 말하고 있지만, 실제 응양위에 1,000명이 있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국왕의 근접 경호를 담당하는 응양위에 1,000명의 군인이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령’은 ‘1천 명의 군사를 일컫는 단위’라는 뜻과 더불어 ‘단위 부대’의 뜻이 있었으므로, 응양군 1령이라는 말은 응양군에 1,000명이 있다는 말이 아니라, 응양군에 69명의 부병으로 이루어진 단위 부대가 있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중랑장~대정으로 이루어진 이 69명이 국왕의 근접 경호를 담당하는 근장으로서 기능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변천

응양위는 1395년(태조 4) 판의흥삼군부사(判義興三軍府事)정도전(鄭道傳)의 요청에 따라 웅무시위사(雄武侍衛司)로 개칭되었다(『태조실록』 4년 2월 13일). 이로써 중앙군으로서의 응양위라는 명칭은 사라지게 된다. 고려 현종대에 2군(軍)의 하나로 설치된 이후 380여 년 만에 폐지된 것이다. 그런데 1404년(태종 4)에 다시 응양위라는 이름으로 중앙군에는 속하지 않는 국왕 직속 친위군이 설치되었다. 이때 응양위는 설치된 직후 사헌부 등으로부터 혁파 요구가 있었고(『태종실록』 6년 2월 5일), 1419년(세종 1)에는 성중애마(成衆愛馬)와 더불어 일시 혁파한 듯하지만(『세종실록』 1년 2월 24일), 그 이후에도 계속 존속하여 1474년(성종 5년)에 가서야 혁파되었고 그 군사들은 내금위(內禁衛)와 통합되었다. 조선초기에는 정국이 불안정하여 중앙군과 같은 정식 지휘체계를 거치지 않고 왕의 측근에서 왕을 시위하는 군사가 필요하였기 때문에 그 혁파가 지연된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李基白, 『高麗兵制史硏究』, 一潮閣, 1968.
  • 金鍾洙, 「高麗·朝鮮初期의 府兵」, 『歷史敎育』69, 1999.
  • 鄭景鉉, 「高麗前期 二軍六衛制 硏究」,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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