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산역(元山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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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황해도 지역의 도로망인 기린도를 구성하는 역으로, 황해도 신천군(信川郡)에 위치해 있었음.

개설

원산역(元山驛)은 조선초에 역도-속역 체제가 마련되면서 기린도(麒麟道)를 구성하는 역 중 하나로 편제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역(驛)은 중앙 집권 체제를 유지하고 중앙과 지방의 행정 명령 계통을 확립하기 위해 설치되었다. 역을 설치한 목적은 왕명(王命) 및 긴급한 군기(軍機) 사항의 전달이나 사신(使臣)의 왕래에 따른 영송지대(迎送支待) 등이며, 이외에도 진상(進上) 또는 공부(貢賦)의 운송 및 왕래인(往來人)의 규찰(糾察) 등을 맡아보았다. 원산역도 이러한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 조선시대부터 황해도 지역에 설치되었다.

변천

원산역의 정확한 설치 시기는 나와 있지 않지만, 고려말기에서 조선초기 사이에 설치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초에 전국적인 역도-속역 체제가 새로 마련되면서 기린도의 속역으로 편제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원산역은 기린역(麒麟驛)·달만역(達滿驛)·삼지역(三支驛)·진목역(眞木驛)·박산역(朴山驛)·문라역(文羅驛)·안산역(安山驛)·소곶역(所串驛)·도공역(陶工驛)·소곶이역(所串之驛)·단림역(丹林驛)·신로역(新盧驛)·소평역(所坪驛)·위라역(位羅驛)·신흥역(新興驛)·연양역(延陽驛)과 함께 기린도에 속하였다.

1460년(세조 3) 원산역은 기린도와 청단도(靑丹道)를 통합할 때 청단도에 속하였으며, 1462년(세조 8)에 각 도의 역참(驛站)을 파하고 역로(驛路)를 정비하여 찰방(察訪)역승(驛丞)을 두었을 때는 기린역·안산역·문라역·박산역·진목역·연양역·다만역(茶滿驛)·신흥역·위라역·소곶이역과 함께 이상 11역이 기린도찰방(麒麟道察訪)으로 일컫어졌다. 『경국대전(經國大典)』 체제에서의 원산역은 기존의 기린도에 속하였으며, 조선후기까지도 기린도의 속역으로 유지되었다.

대한제국 칙령 제9호 ‘각 역의 찰방과 역속의 폐지에 관한 안건’에 따라 1896년(고종 33년, 건양 원년) 1월 18일자로 폐지되었다.

『대동지지(大東地志)』에 의하면, 원산역의 위치는 관아(官衙)의 동쪽 5리였으며, 해방 당시 위치는 황해도 신천군 신천면 대관리이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여지도서(輿地圖書)』
  • 『대동지지(大東地志)』
  • 조병로, 『한국근세 역제사연구』, 국학자료원,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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