옹진부(瓮津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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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도 서남부에 있으며 북쪽으로 벽성, 동쪽으로 강령, 남쪽으로 황해와 접하는 지역에 설치되어 주민들을 관할하고 황해도 해안을 방어하기 위해 설치한 관청이자 행정구역.

개설

옹진부(瓮津府)는 고려시대부터 옹진현으로 불렸으며, 조선시대 내내 황해도 서남단 해안 방어의 주요 거점이었다. 1720년(숙종 44)에 경내의 소강진첨사(所江鎭僉使)가 황해수영으로 승격되면서 현에서 도호부가 되었으며, 황해수사가 부사를 겸하였다. 1895년(고종 32)에 해주부 옹진군이 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삼국시대에는 고구려 땅이었으며 옹천(甕遷)이라 불렸다. 통일삼국시대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폭지군(瀑池郡)이 되었다. 고려 건국 후 옹진현(甕津縣)이 되었으며, 1088년(고려 현종 9)에 현령이 부임하였다. 조선 건국 후 1397년(태조 6)에 진(鎭)이 설치되었으며 수령이 병마사를 겸하였다.

조직 및 역할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의하면 현이 세워진 초기에는 종5품 현령이 보임되었다. 도호부로 승격된 후에는 황해수사를 겸하는 무반 종3품 관원이 부사로 부임하였다. 수성장겸좌수(守城將兼座首) 1명, 별감 2명, 서창감관(西倉監官) 1명, 고마감관(雇馬監官) 1명이 있었다. 이 외에 아전 26명, 지인 17명, 사령 15명, 관노 15명, 관비 23명이 있었다.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의하면 구월산성 소속으로는 사면성장(四面城將) 4명, 기패관 63명, 근수군관(跟隨軍官) 100명, 관군관 100명, 군기감관 1명이 있었다.

변천

1423년(세종 5)에 병마사를 병마첨절제사로 개칭하였다. 1720년에 소강진첨사를 황해수사로 승격하면서 옹진현은 옹진도호부로 되었고 옹진부사가 황해수사를 겸하였다(『숙종실록』 44년 6월 3일).

1895년에 전국 23부제 실시와 함께 해주부 옹진군이 되었고, 1896년(고종 33)에 전국을 13개 도로 나누면서 황해도 옹진군이 되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황해도(黃海道) 옹진현(甕津縣)
  • 『여지도서(輿地圖書)』황해도(黃海道) 옹진(甕津)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강석화, 「조선후기 황해도 연안 방위체계」, 『한국문화』38, 2006.
  • 고승희, 「조선후기 황해도 內地 방어체계」, 『한국문화』38,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