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인(南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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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중기 이후 동인에서 분파된 당파.

개설

남인은 동인(東人)에서 분파된 붕당의 하나이다. 붕당 형성 이후 정국의 소수 세력으로 활동하던 남인은 숙종 즉위 이후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이후 몇 차례 환국(換局)을 거치며 갑술환국(甲戌換局) 이후에는 명의죄인(名義罪人)이라는 죄목(罪目)이 주어져 다시 소수 세력으로 전락하였다. 이후 남인들 내에서도 영남 남인의 정치적 진출이 좌절된 채 기호남인(畿湖南人) 계열 인물의 활동이 있었고, 정조 즉위 후 왕의 배려에 따라 남인인 채제공(蔡濟恭)의 독상(獨相) 정권이 구성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 와중에 영남 남인은 영남만인소(嶺南萬人疏) 등을 통해 정치적 재기를 모색하였다. 정조 사후 남인은 급격히 퇴조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조선시대 붕당은 1575년경(선조 8) 사림 세력이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면서 시작되었다. 동인과 서인의 붕당 형성은 개인적으로는 심의겸(沈義謙)과 김효원(金孝元) 사이의 반목과 질시가 동기가 되었다(『선조실록』 13년 7월 1일). 그러나 이는 단순한 개인적인 감정 때문이기보다는 이조(吏曹) 전랑(銓郞)의 자천제(自薦制) 운영 문제 등 당시 국정을 어떻게 운영할 것인가를 놓고 발생한 대립의 결과였다. 김효원을 중심으로 한 신진 사류가 동인, 심의겸을 지지하는 기성 사류들이 서인이 되었다.

붕당 형성 초기에는 동인이 우세를 보였으나 1589년(선조 22) 정여립(鄭汝立)의 옥사 등으로 동인이 수세에 몰렸다. 급기야 서인 정철(鄭澈)의 세자 책봉 논의인 건저의(建儲議) 문제에 대한 처벌을 둘러싸고 동인 내부에서 갈등이 표출되었다. 동인 중에서도 남인은 서인에 대해서 온건한 입장을 보이며 동인과 서인을 참용(參用)하자고 주장하였고, 동인 중 북인은 서인의 강경한 처벌을 주장하는 차이를 보였다(『선조수정실록』 21년 8월 1일). 임진왜란을 거치는 가운데 서인과 남인의 연립이 이루어졌으나, 임진왜란 후에는 의병 활동 등으로 정치 명분상 우위를 차지한 북인이 정국을 주도하였다.

조직 및 역할

남인의 전신인 동인에는 다양한 성격을 가진 계열이 포함되었다. 학통상으로 보면 서경덕(徐敬德)의 문인인 허엽(許曄)이 있는가 하면, 조식(曺植)의 문인인 김효원이 있었고, 이황의 문인인 유성룡이나 김성일 등도 역시 동인으로 분류되었다. 이러한 학통의 다기성(多岐性)은 붕당이 활성화되면서 분화가 예고된 것으로, 남인과 북인의 분당은 조선 붕당의 중요한 특성인 학통을 고려한다면 필연적인 일이었다. 그 결과 이황의 학통을 계승한 인물 상당수가 남인으로, 서경덕과 조식의 학통을 이은 인물 상당수는 북인으로 당색을 갖게 되었다.

남·북으로 분당되던 초기 남인은 유성룡이 영수(領袖)로, 김성일과 이성중·이경중 등이 우익(羽翼)으로 참여하였다. 이들 이외에도 윤국형(尹國馨)과 우성전(禹性傳)을 비롯해(『선조실록』 32년 1월 18일) 이원익(李元翼)·이덕형(李德馨)·이수광(李晬光)·윤승훈(尹承勳) 등이 남인으로 분류된다. 남인은 이황의 문인들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는데, 지역적으로는 서울과 안동을 중심으로 한 경상좌도 출신들이 대거 포진하였다.

변천

광해군대에 남인은 서인 및 북인의 한 분파인 대북(大北) 세력과 함께 연립 정권을 구성한 적도 있으나, 대개는 대북 세력 주도의 정국 운영이 이루어지면서 남인은 소수 세력이 되었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을 계기로 대북 세력이 대거 축출되면서 서인 정권이 들어섰다. 이 과정에서 남인계의 이원익(李元翼)이나 이성구(李聖求) 등을 비롯해 산림(山林)으로 정경세(鄭經世), 장현광(張顯光) 등이 출사(出仕)하였다. 아울러 종래 북인 내 한 분파인 소북(小北) 세력들 일부는 남인이나 서인으로 당색을 바꾸는 일도 있었다. 여주이씨이상의(李尙毅) 가계나 남원윤씨윤효전(尹孝全) 가계 등이 이에 해당된다.

한편 인조 초반 남인의 출사는 서인과의 연립 정권 구성을 위한 것은 아니었고, 정권을 장악한 서인들의 정치적 고려 때문이었다. 즉 반정 공신들을 견제하기 위해 인조가 억강부약(抑强扶弱) 차원에서 남인의 진출을 돕자 반정 공신들 내부에서 이조 판서 이하는 남인의 진출을 용인하되, 이조 판서 이상 및 정승에 진출하는 것은 불허한다는 밀약을 세웠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인조대 이후 남인들의 진출이 있기는 했으나 소수 세력으로 정권에 참여할 뿐이었다.

이러한 양상은 효종대를 거쳐 현종대까지 계속되었다. 이런 가운데 1659년(현종 즉위) 기해예송(己亥禮訟)이 발생했을 때 허목(許穆)이나 윤선도(尹善道), 윤휴(尹鑴) 등이 참여하여 남인 측 예학에 대한 입장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윤선도가 제출한 상소는 학문적 논쟁을 정치적 논쟁으로 비화시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남인은 소수 세력으로 존재하였다가 현종 말년 서인계 김육이나 김우명 등이 중심이 된 한당(漢黨) 세력과 정치적 제휴가 이루어졌으며, 현종 말 갑인예송(甲寅禮訟) 과정을 거치며 한당과 연결된 남인이 승리하였다. 인조반정 이후 소수 세력으로 정권에 참여하였던 남인이 비로소 정권을 장악한 것이다.

숙종 즉위 후 정권을 잡게 된 남인은 서인 세력의 축출에 힘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기해예송의 책임을 물어 송시열에 대한 처벌을 주장하였으며, 동시에 자신의 세력 진출을 모색해, 허목이 대사헌에, 윤휴가 장령에 제수되었으며 그 동안 폐고(廢固)되었던 남인계 인사인 홍여하·이무(李袤)·조사기(趙嗣基)·오정창(吳挺昌) 등이 서용되었다. 본격적인 남인 주도의 정국이 조성되어 가는 상황이었다.

남인은 집권 이후 서인에 대한 처리 방향이나 국정 운영의 방향 등에 있어서 내부적으로 차이를 보이며 내부 분열 현상이 나타났다. 청남(淸南)탁남(濁南)의 분열이 그것이다. 청남이란 허목과 윤휴를 영수로 한 세력으로, 오정창·오정위(吳挺緯)·오시수(吳始壽) 등의 동복오씨와 이무·조사기·이서우(李瑞雨) 등이 이에 해당된다. 탁남계란 허적(許積)과 권대운(權大運)을 영수로 한 세력으로, 민희(閔熙)·민점(閔點)·목내선(睦來善) 등을 비롯해 유명천(柳命天)·유명현(柳命賢)·민암(閔黯) 등이 이에 해당된다. 이런 남인 내 분파 과정에서 몇몇 인물들은 양측과 모두 교감하였는데 이하진(李夏鎭)을 비롯해 이담명(李聃命)·이옥(李沃)·조위명(趙威明) 등이 그러했다. 당시 『조선왕조실록』 기사에서는 이들에 대해 "두 쪽 사이에 양다리를 걸쳤다."고 기록하였다(『숙종실록』 1년 6월 4일).

남인 내 청남과 탁남의 갈등은 시간이 지날수록 심해지는 가운데, 1680년(숙종 6)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남인에서 서인으로 정권이 교체되어 청남이나 탁남 모두 상당한 인적 손실을 경험하였다. 이후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남인이 재집권하였으나 1694년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다시 정권에서 축출되었다. 특히 갑술환국은 남인에게 인현왕후 폐비와 관련되어 명의죄인(名義罪人)이라는 죄목을 덧씌우게 됨으로써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다. 특히 대표적인 명의죄인으로 지목된 이현일(李玄逸)을 중심으로 한 영남 남인들은 이후 중앙 정계의 진출이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남인에게 주어진 명의죄인이라는 죄목은 이후 남인들의 정치적 입지를 약화시켰으며, 그 과정에서 남인 내부에서 변화들이 모색되었다. 집권 세력인 서인에 귀부(歸附)하거나 혼인 관계를 통해 권력에 접근하기도 하였다. 또한 18세기 전반에는 남인들 사이에서 문내파(門內派)·문외파(門外派)·과성파(跨城派)라는 분파가 형성되었다. 문내파는 권중경(權重經)·김화윤(金華潤)·권진경(權鎭經) 등이, 문외파는 심단(沈檀)·이인복(李仁復)·이중환(李重煥) 등이 중심이었고, 이들 양 파 사이를 오가는 세력이 과성파였다. 문내파는 주로 숙종 초 탁남 계열인 허적과 사천목씨·여흥민씨·진주유씨 등이 주도하였고, 문외파는 주로 허목과 관련된 인물들이 주도하였다.

이들 중 문내파는 일부 세력이 1728년(영조 5)에 있었던 무신란(戊申亂), 즉 이인좌의 난에 가담하면서 결정적 타격을 입었다. 반면 문외파는 심단이나 오광운(吳光運) 등의 집권 세력과 밀착되면서 세력을 굳혀가며 정치에 진출하였으며, 18세기 후반에는 채제공(蔡濟恭)을 영수로 남인계의 입지를 다져 나갔다. 정조 연간 왕의 정치적 배려와 채제공의 활동 등으로 남인의 진출이 활발해져, 정약용(丁若鏞)이나 이가환(李家煥) 등이 진출하였고, 1788년에는 채제공이 독상(獨相) 정권을 구성하기까지 하였다. 이렇게 남인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된 문외파는 퇴계이황-한강(寒岡)정구(鄭逑)-미수허목으로 이어진 학통을 정립해 갔으며, 18세기 후반에는 퇴계-한강-미수-성호(星湖)이익(李瀷)의 남인 학통이 확립되었다.

한편 갑술환국과 무신란을 거치면서 거의 정치적 진출이 좌절되었던 영남 남인들 역시 정조 재위 시에 활발한 동향을 보였다. 일단 정조가 즉위하자마자 정조의 생부인 사도세자의 죽음이 억울하다며, 이와 관련된 역신(逆臣)의 처벌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즉위 초기 정치적 기반의 미성숙으로 인해 정조는 이를 거부하였다. 서서히 정조의 집권 기반이 안정되면서 남인 세력의 진용이 이루어졌고 채제공의 독상이 이루어지는 상황에서 정조는 남인계 세력의 진출을 모색하였다. 이 과정에서 무신란 당시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운 영남 남인들의 행적을 적극적으로 평가하였다.

1791년 천주교도인 윤지충(尹持忠)이 모친상 때 신주를 모시지 않고 제사도 드리지 않은 데서 진산사건(珍山事件)이 일어났다. 이때 서교(西敎)나 서학(西學)과 연결된 남인계 인물에 대한 정치적 공격이 이루어져 정약용이나 이승훈 등이 처벌되었다. 진산사건으로 남인계가 타격을 받은 상황에서 정조는 정학(正學)을 보존한다는 명분으로 이언적이나 이황 자손의 우대와 함께 도산서원에서 별시를 시행하였다. 정조의 배려에 영남 남인들은 고무되었고, 다음 해인 1792년 윤4월 이우(李堣)가 중심이 되어 영남만인소(嶺南萬人疏)를 제출, 다시 한 번 사도세자와 관련된 의리를 제기하였다. 정조는 또한 1798년에는 영남 인물로서 뚜렷한 족적을 남긴 인물의 행적을 정리한 『영남인물고(嶺南人物考)』을 편찬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채제공의 사망에 이어서 정조가 승하하며 남인계는 급격히 퇴조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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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