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부(慶州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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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경상북도 경주시 중심 시가지 지역을 중심으로 편성되었던 조선시대의 관청이자 행정구역.

개설

경주부(慶州府)는 신라의 왕경(王京)이었던 유서 깊은 곳으로, 신라 건국 때부터 멸망 때까지 왕경으로서 번영하였다. 고려시대에 경주는 동경유수관(東京留守官)으로 편제되어 부수도의 기능을 수행하기도 했으며, 경상도 방면을 대표하는 계수관(界首官)이자 14개의 속군현(屬郡縣)을 거느리는 거읍(巨邑)으로 중시되었다. 1308년(고려 충렬왕 34)에 동경유수관은 계림부(雞林府, 鷄林府)로 개칭되었으며, 조선 건국 후에도 계림부(鷄林府)라는 명칭이 한동안 사용되었다. 1415년(태종 15)에 경주부 즉 경주대도호부(慶州大都護府)로 개칭한 이래 19세기 말까지 유지되었다. 경주부에는 종2품의 대도호부사(大都護府使)가 지방관으로 파견되었다. 조선시대에 경주는 경상도에서 경상도관찰사를 제외하고 종2품의 관품을 가진 지방관이 파견된 유일한 곳이었다. 조선시대의 경주는 그만큼 국가적으로 중요한 곳으로 간주되었다.

하지만 경상도감영(慶尙道監營)은 조선시대에 대부분의 기간 동안 경주에 있지 않았다. 고려시대에 경상도안찰사영(慶尙道按察使營)은 경주에 가장 오래 있었고, 조선 건국 시에도 그대로 경주에 경상도감영이 위치하였으나, 1408년(태종 8)경에 상주(尙州)로 이전된 후 다시는 경주로 경상도감영이 돌아오지 못했다. 1895년(고종 32)에 전국을 23부로 나누었을 때 경주부는 경주군(慶州郡)이 되어 23부 중 하나인 경주부 즉 경주관찰부(慶州觀察府)의 치소(治所)가 위치한 고을로 중시되었다. 1896년(고종 33)에 13도제가 실시되면서 경주군은 경상북도의 1등군으로 편성되었다. 조선시대에 경주부의 읍치는 현재의 경상북도 경주시 중심 시가지 지역에 위치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경주부는 본래 신라 왕경이 있던 곳이며, 신라시대의 정치와 경제·문화의 중심지로서 오랫동안 크게 번영하였다. 935년(고려 태조 18)에 신라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해 오자, 고려는 신라 왕경을 경주로 개칭하였다. 940년(고려 태조 23)에 경주대도독부(慶州大都督府)가 되었고, 987년(고려 성종 6)에 동경유수(東京留守)로 고쳤다가 995년(고려 성종 14)에 동경유수사(東京留守使)라 하여 전국에 편성된 10도(十道) 중 영동도(嶺東道)의 대표 고을로 편성하였다. 1012년(고려 현종 3)에 경주방어사(慶州防禦使)로 삼았다가 1014년(고려 현종 5)에 안동대도호부(安東大都護府)로 고쳤고, 1030년(고려 현종 21)에 다시 동경유수로 삼았다. 1204년(고려 신종 7)에 지경주사(知慶州事)로 강등되었다가 1219년(고려 고종 6)에 다시 동경유수가 되었다. 1308년(고려 충렬왕 34)에 계림부로 개칭하였고, 1376년(고려 우왕 2)에는 김주(金州: 현 경상남도 김해시 일대)에 있던 경상도의 안렴사영(按廉使營)을 계림부로 이전하였다. 조선 건국 이후에도 계림부라 부르다가 1415년(태종 15)에 경주부로 개칭하였다. 조선시대에 경주부에는 종2품의 부윤(府尹)이 임명되었다.

조직 및 역할

경주부는 신라시대에 왕경으로서 번영했던 곳이며,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도 경상도의 대표 고을로 기능하였다. 고려시대에는 동경유수관이 설치되어 부수도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고려시대에 동경에는 3품 이상의 유수사(留守使) 이하 4품 이상의 부유수(副留守), 6품 이상의 판관(判官), 7품 이상의 사록참군사(司錄參軍事)와 장서기(掌書記), 8품 이상의 법조(法曹), 9품의 의사(醫師)와 문사(文師) 등이 임명되었다. 1308년(고려 충렬왕 34)에 계림부로 개칭된 후에는 부윤과 판관, 사록(司錄), 법조 등이 임명되었다. 또한 고려시대에는 경상도의 안찰사영(按察使營)이 경주에 위치하였다. 경상도안찰사영은 김주에 있었던 적도 있지만 경주에 있었던 시기가 더 길었다. 특히 1376년(고려 우왕 2) 이래로는 경상도안렴사영이 경주에 위치하였다. 1389년(고려 창왕 1)부터 안렴사는 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使)로 개칭되었다. 그리고 경주에 있던 경상도관찰사영(慶尙道觀察使嶺)은 1408년(태종 8)경에 상주로 이전하였다. 하지만 이후 경상도관찰사영은 경주에 돌아오지 못했다.

『고려사(高麗史)』 「지리지」에 따르면 동경은 상주, 진주(晉州)와 더불어 경상도의 3개 계수관(界首官) 중 하나로서 편제되었으며, 14개의 속군현을 거느리는 대읍으로서 기능하였다. 조선시대의 경주부에는 종2품의 부윤이 지방관으로 임명되었다. 조선시대 경상도에 부윤이 임명된 고을은 경주부가 유일하였다. 경상도관찰사의 품계 역시 종2품이었으므로 경주부윤의 지위는 경상도관찰사에 버금갈 정도로 높았다. 즉 경주는 신라시대와 고려시대에 이어 조선시대에도 명실상부한 경상도 최고의 고을로 중시되었다. 고려시대에 동경에는 유수관 등이 근무하는 외관청(外官廳)과 별도로 읍사(邑司)가 설치되어 토착의 향리(鄕吏)들이 자치적으로 지방 행정업무를 수행하였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고려시대와 달리 향리의 권한과 지위는 약화되고 경주부윤에게 모든 권한이 집중되었다.

조선시대에 경주부의 영역은 기존 고려시대의 동경에 직속했던 영역 외에, 고려시대 동경의 속군현으로 존재했던 안강현(安康縣)·기계현(杞溪縣)·신광현(神光縣)·자인현(慈仁縣) 등의 영역, 그리고 구사부곡(仇史部曲: 현 경상북도 경산시 진량읍 일대)·죽장부곡(竹長部曲: 현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죽장면 일대)·북안곡부곡(北安谷部曲: 현 경상북도 영천시 북안면 일대)·성법이부곡(省法伊部曲: 현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기북면 일대) 등 옛 부곡의 영역까지도 포함하였다. 그런 까닭에 경주부의 영역은 다른 고을에 비하여 굉장히 넓게 구성되었으며, 자인현과 북안곡부곡·구사부곡 등은 이웃한 영천군(永川郡)의 영역을 넘어 들어간 땅인 이른바 ‘월경지(越境地)’에 해당하였다. 자인현은 1637년(인조 11)에 경주로부터 분리되었고(『인조실록』 11년 1월 8일), 옛 구사부곡의 땅도 자인현에 편입되었다.

『경국대전(經國大典)』과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경주부에 종2품의 부윤과 종5품의 판관(判官), 종6품의 교수(敎授)가 파견된 것으로 기록되었다. 그리고 부윤은 병마절제사(兵馬節制使)를 겸임한다고 되어 있다. 18세기에 편찬된 지리서인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의하면 경주부에는 종2품의 문관(文官)이 부윤으로 임명되며, 좌수(座首) 1명, 별감(別監) 3명, 군관(軍官) 452명, 인리(人吏) 118명, 지인(知印) 31명, 사령(使令) 30명, 군뢰(軍牢) 30명, 관노(官奴) 84명, 관비(官婢) 19명이 편성되었다. 즉 판관과 교수는 이때에 이미 폐지되었다. 19세기에 편찬된 법전인 『대전회통(大典會通)』에도 경주에 종2품의 부윤이 임명된다는 내용이 있으나, 판관과 교수는 폐지된 것으로 나와 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경주부의 호수가 1,552호, 인구는 5,894명으로 나와 있다. 또한 경주에 병합되었던 안강·기계·신광·자인의 4곳 속현(屬縣)의 호수는 각각 271호·177호·95호·237호 등이며, 인구는 1,450명·491명·448명·1,006명 등으로 기록되었다. 자인현이 분리 독립한 이후의 기록인 『여지도서』에는 1759년(영조 35) 경주부의 호수가 17,219호, 인구는 70,891명으로, 그중 남자가 29,313명이고, 여자가 41,578명이라고 기재되었다. 18세기 후반에 편찬된 자료인 『호구총수(戶口總數)』에 의하면 경주부에 16개의 면과 269개의 리가 기재되었다. 『여지도서』에는 17개의 면이 기록되었다. 『호구총수』에 실린 16개 면은 읍내면(邑內面)·내방면(內方面)·외방면(外方面)·동해면(東海面)·내남면(內南面)·외남면(外南面)·서면(西面)·산내면(山內面)·천북면(川北面)·현곡면(見谷面)·강동면(江東面)·강서면(江西面)·신광면(神光面)·기계면(杞溪面)·죽장면(竹長面)·북안면(北安面)인데, 이 중 『여지도서』에는 내방면·외방면·내남면·외남면·서면 5개 면이 빠져 있고, 그 대신 동면로동(東面路東)·동면로서(東面路西)·남면로동(南面路東)·남면로서(南面路西)·서면로동(西面路東)·서면로서(西面路西) 6개 면이 실려 있다. 명칭과 거리 등을 감안할 때 『호구총수』의 내방면·외방면·내남면·외남면은 『여지도서』에서 동면로동·동면로서·남면로동·남면로서에 대응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호구총수』의 서면은 『여지도서』에는 서면로동과 서면로서의 2개 면으로 나뉘어 기재된 것으로 보인다.

『호구총수』에 따르면 경주부의 호수는 18,151호, 인구는 71,956명으로, 남자는 29,515명, 여자는 42,441명이다. 1910년(순종 4)의 조사 내용인 『민적통계표(民籍統計表)』에 따르면 경주의 호수는 19,467호이고 인구는 90,943명으로, 그중 남자가 49,208명, 여자가 41,735명이라 기록되었다. 조선시대에 경주부의 읍치와 관아는 현 경상북도 경주시 동부동, 서부동, 북부동, 노동동, 노서동, 성동동, 황오동, 성건동 일대에 위치하였다.

변천

1415년(태종 15)에 계림부가 경주부로 개칭된 이래, 조선시대 내내 경주부의 연혁 변동과 관련된 내용은 거의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1631년(인조 11)에 옛 자인현의 영역이 경주로부터 분리되어 새롭게 자인현으로 분리되었다. 새로 만들어진 자인현의 영역에는 옛 구사부곡의 땅도 함께 편입되었다. 19세기 말인 1895년(고종 32)에 전국을 23부로 나누었을 때 경주군으로 개칭되어 23부 중 하나인 경주부 즉 경주관찰부의 치소가 되었다. 1896년에 23부제가 폐지되고 13도제가 실시되면서 경주군은 경상북도 관할하의 1등군으로 편제되었으며, 이후에도 그대로 유지되었다.

참고문헌

  • 『삼국사기(三國史記)』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
  • 『대동지지(大東地志)』
  • 『민적통계표(民籍統計表)』
  • 『신구대조조선전도부군면리동명칭일람(新舊對照朝鮮全道府郡面里洞名稱一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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