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운역(瑞雲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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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강원도의 도로망인 은계도에 속한 역으로, 오늘날의 강원도 철원군 원남면에 위치해 있었음.

개설

조선 세종 때 전국의 역로(驛路)를 44역도(驛道)-537속역(屬驛) 체제로 정비하였다. 이후 세조 때 다시 41역도-543속역 체제로 개편하는 과정에서, 서운역(瑞雲驛)은 은계도(銀溪道)를 구성하는 역의 하나로 확립되었다. 이후 조선후기까지 존속했으나, 갑오개혁이 마무리되는 시점인 1896년(건양 1) 1월에 폐지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서운역의 설치 시기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최초로 서운역이 언급된 『세종실록』「지리지」에는, 회양도호부 금성현에 직목역(直木驛)·창도역(昌道驛)·서운역이 있으며, 서운역의 옛 이름은 간파(看波)인데, 1414년(태종 14)에 서운으로 개칭했다고 되어 있다. 이 기록으로 미루어 보면, 서운역은 고려시대부터 존재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조직 및 역할

영조 때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 금성현 편에 따르면, 서운역에는 대마(大馬) 2필, 복마(卜馬) 6필과, 역리(驛吏) 116명, 역노(驛奴) 27명, 역비(驛婢) 7명이 배속되어 있었다.

변천

조선 세종 때 전국의 역로를 44역도-527속역 체제로 정비하면서, 강원도 지역에는 보안도(保安道)·대창도(大昌道)·평릉도(平陵道) 등 3개의 역도를 두었다. 그런데 서운역은 은계역 등과 함께, 역도에 포함되지 않은 19개 역 가운데 하나였다. 그 뒤 세조 때에는 41역도-543속역 체제로 개편하면서 기존의 대창도를 폐지하고 은계도와 상운도(祥雲道)를 신설했는데, 서운역은 이때 은계도찰방이 관할하는 17개 역 중의 하나가 되었다. 이후 조선후기까지 은계도에 소속된 역으로 유지되었으나, 1896년(건양 1) 1월에 대한제국 칙령 제9호 ‘각 역 찰방 및 역속 폐지에 관한 건’에 따라 폐지되었다.

서운역의 위치는 『여지도서』와 『대동지지(大東地志)』에는 금성현 남쪽 30리,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금성현 남쪽 29리 지점으로 기록되어 있다. 오늘날의 위치는 강원도 철원군 원남면 서운리이다. 『해동지도(海東地圖)』강원도 금성현 편에는 서운역이 오늘날의 화천(華川)에 해당하는 낭천(狼川)으로 연결된다고 하였다. 한편, 조선후기의 문인 이만부(李滿敷)의 문집인 『식산집(息山集)』에는 서운역에 관련된 시가 전한다.

참고문헌

  • 『여지도서(輿地圖書)』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대동지지(大東地志)』
  • 『해동지도(海東地圖)』
  • 『식산집(息山集)』
  • 조병로, 『한국근세 역제사연구』, 국학자료원, 2005.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