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당(北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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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대 중반 이후 한양 북촌을 기반으로 홍봉한이 이끌던 노론 당파.

개설

영조대 중반 이후 노론 내에서 분화한 북당은 홍봉한(洪鳳漢)을 영수로 하여 영조대 탕평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홍봉한의 아우 홍인한(洪麟漢)이 후일 영조가 되는 세손의 대리청정을 반대하다가 역적으로 처벌되어 세력을 잃었다. 정조대에는 시파(時派)로 계승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1755년(영조 31)의 을해옥사(乙亥獄事)와 『천의소감(闡義昭鑑)』 편찬을 계기로 노론 의리에 기반을 둔 국시(國是)가 확정되었다. 이 시기를 전후하여 완전한 우위를 확보한 노론은 탕평의 노선과 세자의 장인인 홍봉한에 대한 태도를 둘러싸고 북당(北黨)·동당(東黨)·남당(南黨)이 경쟁하는 구도로 분화하였다(『영조실록』 34년 7월 9일).

북당은 주로 경복궁 주변 북촌(北村)에 거주하던 노론 벌열 가문을 기반으로 하며 영조 탕평의 중추 역할을 담당했으므로 소론·남인 세력 가운데 재능 있는 자를 등용하는 데 적극적이었다. 북당의 주도자는 홍봉한이었다. 그는 영조대 중반 그 지위를 위협 받던 세자를 보호하기 위하여 노론·소론의 반(反) 세자 세력에 맞섰다. 홍봉한은 이를 위하여 노론 동당과 준소 세력과도 연대하였지만, 임오화변으로 인해 세자 보호는 실패하였다. 그러나 그는 영조의 뜻에 따라 임오화변의 후속 조치로서 세손의 종통을 변경하는 갑신처분(甲申處分)을 받들었고[『영조실록』 40년 2월 20일], 이에 입각하여 세손 보호를 자임하며 정국 주도력을 잃지 않았다.

그러나 갑신처분 이후 홍봉한의 위상에는 결정적 한계가 있었다. 그는 이제 장래의 국구(國舅)가 아니라 세손의 혈연상 외조부에 불과하였고, 임오화변을 막지 못한 책임을 지고 물러나야 할 존재이기도 하였다. 더구나 명실상부한 국구 김한구(金漢耈)와 그 아들 김구주(金龜柱)가 가세한 남당이 강력한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다. 영조 46~47년에 있었던 홍봉한의 은언군·은신군 추대 음모설은 근거 없는 것이었지만, 홍봉한의 실세(失勢)에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이 무렵에 집중된 공격은 홍봉한을 반대하는 공홍(攻洪), 곧 살홍론(殺洪論)에 이르는 데까지 목표로 한 것이었다.

홍봉한 이후 새롭게 북당을 이끈 것은 아우 홍인한이다. 그 역시 세손 보호를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소론 탕평당 정후겸과 결탁하여 세손을 장악하려는 것이었다. 이는 세손과 궁료(宮僚)들의 반발을 샀다. 세손은 홍봉한과 달리 사도세자와 대립했던 홍인한과 정후겸에 대해 기왕에 나쁜 감정이 있었던 데다가, 이들의 보호 표방이 실제는 정권 유지의 수단에 불과함을 간파했기 때문이다. 결국 홍인한의 북당은 세손의 대리청정까지 반대하며 세손과 대립하다가, 정조가 즉위한 이후에 주요 제거 대상이 되었다. 정조대 정치 의리의 기준이었던 『명의록(明義錄)』은 홍인한과 결탁했던 북당 세력들을 역적으로 제거한 기록이었다(『정조실록』 1년 3월 29일).

변천

정조대 초반에 홍인한계 북당은 몰락하였고, 인맥상 이들과 연관되어 있던 홍봉한계 북당 역시 큰 타격을 받았다. 그러나 북당의 가문적 기반은 튼튼했으므로 세력 자체가 붕괴한 것은 아니었다. 더구나 영조대에 비하여 정조대 혜경궁의 위상은 높았기 때문에 홍봉한 가문과 연계된 북당 인맥은 정조 4년 무렵부터 역량을 다시 결집하였다. 이후 홍봉한계 북당은 시파에 합류하여 정조 탕평의 주요 지지 세력이 되었다.

참고문헌

  • 『명의록(明義錄)』
  • 김성윤, 『조선 후기 탕평 정치 연구』, 지식산업사, 1997.
  • 유봉학, 『개혁과 갈등의 시대: 정조와 19세기』, 신구문화사, 2009.
  • 박광용, 「조선 후기 「탕평」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4.
  • 이근호, 「영조대 탕평파의 국정 운영론 연구」, 국민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2.
  • 최성환, 「정조대 탕평 정국의 군신 의리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