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천현(木川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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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에 설치된 조선시대 지방 관청이자 행정구역 명칭.

개설

목천현(木川縣)은 조선시대 충청도 청주목에 속한 현이다. 조선 1413년(태종 13)에 설치되었다. 15세기에 호수가 404호, 인구가 2,186명이었다. 군정(軍丁)은 시위군(侍衛軍) 8명, 진군(鎭軍) 3명, 선군(船軍) 191명이었다. 1895년(고종 32)의 지방제도 개정 때 군으로 승격하여 공주목의 관할이 되었다. 1914년에 천안군에 흡수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삼국시대에 목천현은 백제의 대목악군(大木岳郡)이었다. 통일신라시대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대록군(大麓郡)으로 고쳤다. 고려 때 목주(木州)로 고쳐 청주의 임내로 삼았다가, 1172년(고려 명종 2)에 독립하여 감무(監務)를 두었다. 조선이 건국한 뒤에 고려 때의 양광도 청주목 목주 지역에서 지금의 충청남도 연기군 지역인 연기현(燕岐縣)을 떼어 내고 현으로 설치하였다.

조직 및 역할

수령은 종6품 현감이다. 조선후기에는 문과 출신과 음서 출신을 교대로 수령으로 임명하는 지역이었다. 『여지도서(輿地圖書)』의 18세기 통계를 보면 관아에 좌수 1명, 별감 2명, 군관 30명, 아전 24명, 지인 10명, 사령 24명, 관노 4명, 관비 4명이 속해 있었다.

변천

1655년(효종 6)에 남편을 죽인 죄인인 잉덕(芿德)의 태생지라고 하여 고을을 폐하고(『효종실록』 6년 5월 23일), 전의현(全義縣) 소속으로 두었다가 1664년(현종 5)에 복구하였다(『현종실록』 5년 1월 9일). 1685년(숙종 11)에는 진천현을 폐현하면서 목천현에 병합하였다. 1690년(숙종 16)에 진천현을 복현하면서 원래대로 되었다.

조선후기에는 8개 면으로 구성되었다. 1759년(영조 35)의 기묘장적(己卯帳籍)에 의하면 8개 면 도합 호구 3,640호, 남자 8,216명, 여자 7,035명이었다. 토지는 밭이889결 10부 6속, 논이 874결 71부 4속이었다. 1895년(고종 32)에 지방제도 개정으로 전국을 23부(府)의 행정 구역으로 나누었는데 이때 충청북도 청주군의 수신면 전체를 병합하여 목천군이 되었고, 1896년(고종 33)에 충청남도 목천군이 되었다. 1900년(고종 37)의 『목천군양안(木川郡量案)』을 보면 민호는 4,459호, 토지는 2003결 89부 3속이었다. 1914년의 지방행정구역 통폐합 때 천안군, 목천군, 직산군 3개 군이 통합해 천안군이 되었다.

참고문헌

  • 『대동지지(大東地志)』
  • 『대록지(大麓志)』
  • 『목천읍지(木川邑誌)』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