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안군(樂安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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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순천시(현: 낙안면·외서면·별량면)와 보성군(현: 벌교읍), 고흥군(현: 동강면) 일부 지역에 설치된 조선시대 지방 관청이자 행정구역 명칭.

개설

낙안군은 고려 때 설치되어 조선으로 이어졌다. 고려 940년(고려 태조 23)에 낙안으로 이름을 바꾸고 나주목의 속현이 되었다. 1172년(고려 명종 2)에 감무를 두었다가 다시 군으로 삼았다. 조선이 건국한 후에도 이것이 이어졌다. 1409년(태종 9)에 낙안군이 관할해 오던 4소 1부곡을 낙안군에 편입하였다. 1455년(세조 1)에 낙안군이 전라도 순천진(順天鎭)의 우익을 맡았다. 1457년(세조 3)에는 낙안군이 전라도 7진 가운데 하나인 순천진에 속했다. 1515년(중종 10)과 1555년(명종 10)에 낙안군이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원래대로 복구되었다. 1895년(고종 32)에 8도제가 폐지되고 23부제가 시행되면서 낙안군이 폐지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고려사』에는 940년에 낙안으로 고치고 나주목에 소속시킨 것으로 되어 있다. 1172년에 낙안군에 감무를 두었다가 다시 지군사(知郡事)로 하였다. 조선이 건국한 후에도 이것이 이어졌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1409년에 도관찰사(都觀察使)윤향(尹向)이 건의하여, 수령이 파견되지 않은 전라도의 현과 향·소·부곡은 거의 모두 본 고을에 합쳐졌다. 이때 낙안군이 관할해 오던 4소 1부곡이 낙안군의 직촌(直村)이 되었다. 4소는 가용(加用)·품어(品魚)·초천(草川)·개령(開寧)이며, 1부곡은 군지(群智)이다.

조직 및 역할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낙안군에 관원으로 종4품 군수(郡守) 1인과 종9품 훈도(訓導) 1인을 둔다고 되어 있다. 군수는 종4품 병마동첨절제사(兵馬同僉節制使)를 겸하였다. 훈도는 5백 호 이상인 고을에는 모두 두기로 한 것에 따른 것이다(『세종실록』 12년 1월 21일). 낙안군수 밑에 중앙 관제와 마찬가지로 이·호·예·병·형·공 6방을 두었다. 군수 아래 향청(鄕廳)의 향임(鄕任)으로 좌수(座首)와 별감(別監) 등을 두었다. 이들은 6방을 나누어 장악하여 부사의 지방 행정을 보좌하였다. 향임은 대부분 부세의 분배와 징수, 향풍의 교정, 향리의 감찰 등을 맡았다.

1447년(세종 29)에 연변(沿邊)의 수령을 무재(武才)가 있는 자로 임명하고, 긴요(緊要)한 정도에 따라 무관 임명 때도 차등을 두게 하였다. 하긴(下緊)으로 분류된 낙안에는 비록 무과(武科)나 무재록(武才錄)에 오르지 못하였을지라도 이재(吏才)와 지략을 겸비한 자를 가려서 임명하기로 하였다(『세종실록』 29년 9월 4일). 1500년(연산군 6)에도 문신이 아닌 무과 출신자를 임명하여 방비하자는 논의가 있었다. 낙안을 비롯하여 순천 등은 바다와 가까워 적에게 노출되기 쉬운 지역인데도 그곳 수령이 대부분 무신이 아니라는 점을 문제로 지적하기도 하였다(『연산군일기』 6년 3월 8일).

변천

낙안군의 읍호가 변경된 것은 두 차례 있었다. 첫 번째는 1515년으로 이막동이라는 자가 친어머니와 동생과 조카딸 등을 죽인 일로 낙안군이 현으로 강등되었다(『중종실록』 10년 2월 15일). 그 시기는 알 수 없지만 다시 낙안군으로 복구되었다. 두 번째는 1555년으로 『증보문헌비고』에는 낙안군이 1555년에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575년(선조 8)에 원래대로 승격되었다고 되어 있다.

1455년에는 각 도의 내지(內地)에도 거진(巨鎭)을 설치하고 주변의 여러 고을을 중·좌·우익으로 나누어서 소속을 정하였다. 낙안군을 전라도 순천진(順天鎭)의 우익으로 삼았다(『세조실록』 1년 9월 11일).

1457년에는 각 도의 중·좌·우익을 폐지하고 거진을 설치하였다. 이른바 진관(鎭管) 체제로 바뀌면서 전라도에는 7곳에 거진이 설치되었는데 순천도 그중 하나이다. 낙안은 전라도의 순천진에 속했다(『세조실록』 3년 10월 20일).

조선후기에는 순천거진이 전라전영(全羅前營)으로 바뀌었다. 전영(前營)의 속읍은 순천·장흥·진도·낙안·보성·강진·흥양·동복·광양·해남 10곳이며, 전영의 병수(兵數)는 마병(馬兵) 5초(哨), 속오(束伍) 46초, 표하군(標下軍) 188명, 당보군(塘報軍) 120명, 수솔군(隨率軍) 895명으로 되어 있다.

1895년에 8도 체제 폐지되고 23부제가 시행되면서 낙안군이 폐지되었다. 1896년(고종 33)에 전국 23부를 다시 13도로 개정할 때 전라남도와 전라북도가 분리되었다. 전라남도는 수부(首府)를 광주에 두었으며, 낙안군을 비롯한 32개 군과 제주목의 1목으로 편성되었다. 낙안군이 관할해 오던 섬이 같은 해에 신설된 돌산군에 편입되었다. 1908년(순종 1)에는 낙안군이 폐지되어 읍내·내서·외서·동상·동하·초상·초하 7개 면이 순천군에, 고상·고하·남상·남하 4개 면이 보성군에 편입되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경국대전(經國大典)』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칙령(勅令)』
  • 『관보(官報)』
  • 『대동지지(大東地志)』
  • 『여지도서(輿地圖書)』
  • 『의안·칙령(議案·勅令)』
  • 김정호, 『지방 연혁 연구-전남을 중심으로』, 광주일보출판국, 1988.
  • 박종기, 『지배와 자율의 공간, 고려의 지방사회』, 푸른역사, 2002.
  • 손정묵, 『한국지방제도·정치사연구(상)-갑오경장~일제강점기-』, 일지사, 2001.
  • 이수건, 『조선시대 지방행정사』, 민음사, 1989.
  • 이존희, 『조선시대 지방행정제도 연구』, 일지사, 1990.
  • 『보성군사』, 보성군사편찬위원회, 2014.
  • 『순천시사』, 순천시사편찬위원회, 1997.
  • 『전라남도지』, 전라남도지편찬위원회, 19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