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변(九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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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대에 북방 몽골족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장성선을 따라 설치한 9개의 진.

개설

명나라는 장강(長江) 유역에서 시작하여 북방으로 그 영역을 확대해 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1368년 몽골 세력을 축출하고 명나라를 건국하였다. 홍무 연간 서쪽 감숙에서부터 동쪽의 요동에 이르는 지역을 취하였지만 이것은 명나라에 또 다른 근심을 가져다주었다. 그것은 긴 방어선을 유지해야 하고 이 넓은 지역을 방어하기 위하여 물적·인적 자원을 많이 투여해야 한다는 부담을 가져야 했기 때문이다.

특히 영락제의 5차례에 걸친 몽골 친정(親征)이 큰 효과를 보지 못하자 명나라는 이 기나긴 방어선의 정비에 노력을 기울였는데, 이것이 명대 장성의 기초가 되었다. 명나라는 이전 시기 장성을 보수하고 돈대나 호(해자) 등을 증축하며 그 방어력 증강을 도모하였다. 정통제(正統帝)가 몽골 지역에 갔다가 포로가 되는 토목보(土木堡)의 변이 발생하면서 변경의 위기가 심화되었고 이러한 위기는 다시 9곳의 군사 요충지인 구변 지역의 방어시설을 증강하는 계기가 되었다. 토목보의 변 이후 100여 년 동안 요동에서 감숙성 서부의 가욕관(嘉峪關)에 이르기까지 6,000㎞가 넘는 변장(邊墻)이 조금씩 축조되어 가면서 구변이 형성되었다. 일반적으로 만리장성으로 칭한다.

내용 및 특징

구변 중 요동은 가장 동쪽에 위치하였는데 요동 서쪽 산해관(山海關)부터 개원(開原), 개원에서 압록강 방면으로 요동변장(遼東邊墻)이 형성되었다. 요동변장은 요서지역을 방어하는 요서변장(遼西邊墻), 요하 유역을 이용하여 심양(瀋陽)과 요양(遼陽), 개원으로 연결되는 요하투변장(遼河套邊墻), 개원에서 무순(撫順)·본계(本溪)를 거쳐 압록강 방향으로 축조된 요동변장(遼東邊墻)의 3구역으로 편의상 구분할 수 있다. 이 3구역을 모두 통칭하여 요동변장이라고 하는데, 이 요동변장은 진나라 시기 축조된 만리장성과는 달리 명대에 설치된 것으로 요동도사를 방어하는 방어선으로 그 길이가 975㎞에 달하였다. 최근 중국은 이 요동변장도 만리장성의 범주 속에 넣었다. 이 요동변장은 만리장성처럼 벽돌로 900여㎞를 일선으로 연결한 것이 아니라 중요한 거점과 거점 사이에 크고 작은 성보와 봉수대 등을 설치한 일종의 방어선이었다. 특히 요동변장이 설치된 요동은 조선과도 접하고 있어 여진이 요동을 점령해 들어오는 시기에는 명나라가 대규모의 파병을 조선에 요청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조선의 입장에서는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에서 여진의 침략을 받을 수 있는 위기가 항상 있었기 무너져 가는 명나라를 위하여 쉽게 파병을 결정할 수 없었다. 요동진의 상황은 조선과 명·조선과 여진의 관계를 결정하는 매우 중차대한 문제였다(『광해군일기』 14년 5월 2일).

계진은 산해관 북쪽 오명구(吾名口)로부터 북경 북쪽의 거용관(居庸關)·자형관(紫荊關)·도마관(到馬關)에 이르는 1,500㎞의 변장을 관할하는 중진이었다.

선부진(宣府鎭)은 서북으로부터 북경을 위협하는 북방 세력에 대한 최초의 방어선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558㎞의 방어선을 동로(東路)·하북로(下北路)·상북로(上北路)·중로(中路)·상서로(上西路)·하서로(下西路) 6구역으로 구분되어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대동진(大東鎭)은 대략 400㎞의 방어선을 관할하며 대동은 옛날부터 산서 북부의 요충지로 선부진과 마찬가지로 그 중요성 때문에 순무(巡撫)·진수총병관(鎭守總兵官)·진수태감(鎭守太監)이 배치되었다.

산서진(山西鎭)은 대동진의 남쪽으로 총길이 800여㎞를 방어하였다. 산서진은 내장성선(內長城線)에 해당하는데 이처럼 외장성(外長城) 안쪽에 내장성(內長城) 방어선을 구축한 것은 선부진 등이 돌파되면 이 지역 일대가 쉽게 북방민족에게 유린당할 수 있기 때문에 2차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이 산서진은 태원진(太原鎭)·삼관진(三關鎭)이라고도 하는데, 태원진이라고 하는 것은 산서성의 성도인 태원을 직접 관할하는 순무(巡撫)도 이 지역에 배치되었기 때문이며, 삼관진이라고 한 것은 이 지역의 안문관(雁門關)·영무관(寧武關)·편두관(偏頭關)을 대표로 부르기 때문이었다.

연수진(延綏鎭)은 연안(延安)과 수덕(綏德)을 합친 것으로 황하의 만곡부 곧 하투(河套)의 중부 지역을 가리키며 약 900여㎞가 연수진의 관할 하에 들어갔다. 이 지역은 사막과 황토고원 사이를 따라 연결되며 동쪽의 선부나 대동진에 비해 지리적으로 평탄하였다. 그만큼 북방민족의 출현과 침입이 용이하여 방어에 더 많은 힘을 기울여야 하는 지역이었다. 이 지역은 나무와 돌이 부족하여 주로 황토를 이용한 판축공법으로 성벽을 수축하였다.

영하진(寧夏鎭)은 연수진의 방어망이 무너질 경우 다음 공격 목표가 되는 곳으로 약 800여㎞의 방어선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 영하진에도 순무·진수총병관·진수태감 등이 배치되었고 상당 부분 판축에 의하여 성벽이 수축되었다. 자연 조건이 열악하고 유사(流砂) 현상도 있어서 장성의 원형이 대부분 남아 있지 못하였다.

고원진(固原鎭)은 섬서진(陝西鎭)으로도 불리며 약 750㎞의 방어선을 가지고 있었다. 명나라 홍치 연간(1488~1505) 타타르의 대규모 침공을 받으면서 성벽이 수축되었지만 그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성벽이 보수 증축되었다.

감숙진(甘肅鎭)은 가장 서쪽 난주(蘭州)로부터 하서회랑(河西回廊)이라 불리는 서역으로 향하는 통로를 따라 북상하다가 마지막 가욕관(嘉峪關)에 이르는 800여㎞의 방어선을 관할하였다.

명나라의 구변진은 장성 방어 체계의 가장 조직화된 모습을 보여 주는데 그 전체 모습을 지도로 보여주는 사료가 위환(魏煥)의 『황명구변고(皇明九邊考)』이었다. 위환은 병부의 관료로 재직하던 시절 실무 체험을 기초로 본서를 만들었다. 그 내용은 역대 장성 방어를 알 수 있는 「진수통고(鎭戍通考)」, 명대 북변 정세를 서술한 「경략통고(經略通考)」, 북방서 서방의 민족 형세를 서술한 「번이통고(番夷通考)」를 책머리에 서술하였다. 그 뒷부분에는 각 진을 서술하여 각각 진의 영역과 방어 체계, 관료 배치와 군대 상황, 대면하고 있는 북방민족과 그들에 대한 대응 등을 열거하는 방식으로 구성하였다. 이후 1569년(융경 3)에는 『구변도설(九邊圖說)』이 편찬되었는데, 이 두 사료는 명대 구변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자료였다.

명칭 유래

구변은 동쪽으로부터 요동(遼東)·선부(宣府)·대동(大同)·연수(延綏, 楡林)·영하(寧夏)·감숙(甘肅)·계주(薊州)·태원(太原)·고원(固原)의 순서로 연결되는데 이 9개 진(鎭)에서 그 명칭 구변진이 유래하였다.

자연 환경

명나라가 방어하고자 하였던 구변진 지역은 범위도 넓고 지형과 지세·기후도 다양하였다. 구변은 평지, 산악지대, 사막, 강 등 다양한 지리적인 특징이 있어서 명나라는 이러한 모든 조건을 최대한 이용하며 성벽을 축조하였다. 즉, 지역마다 가능한 최대한의 자연 조건을 이용하여 성벽을 축조하였다. 산을 깎아서 절벽을 성벽으로 이용하기도 하고 땅을 파 저지대로 만들어 적의 침입을 방어하기도 하였다. 재료 역시 돌·나무·황토 등 각 지역에서 구할 수 있는 것으로 최대한 구하여 성벽을 수축하였다. 특히 명대에는 이전의 황토를 이용하는 판축공법을 대신해 벽돌을 이용해 성벽을 구축하는 전장(磚墻)공법을 이용하였다. 석회로 붙인 벽돌을 양쪽으로 세우고 그 사이에 황토나 돌을 넣어서 성벽을 구축하는 방법으로 그 성벽 위는 성장마도(城墻馬道)를 구축하였다. 성장마도는 여러 마리의 말이 달릴 수 있도록 폭을 유지하여 전투력을 최대한 신속하게 발휘하도록 하였다.

참고문헌

  • 『황명구변고(皇明九邊考)』
  • 『구변도설(九邊圖說)』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