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관(通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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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 파견되었던 중국사행에 참여하여 통역 및 교역 관련 업무를 주로 수행한 역관의 직책명.

개설

통관은 중국의 역관으로 조선사행의 호송, 접대 및 통역 업무, 중국사행에 참여하여 통역 및 교역 업무를 주로 수행하였다. 명대는 상대적으로 역할이 적었지만, 청대는 정식 사행원으로 참여하여 적극적인 외교 활동을 담당하였다. 조선 표류인의 송환 등에 있어 단독 호송관으로 파견되어 오기도 하였다.

내용 및 특징

조·중 관계에서 사행은 실무 외교관으로 역할하였던 역관을 중심으로 외교 활동을 펼쳤다. 일반적으로 통관이라면 중국사행에 참여한 중국의 역관을 통칭하지만,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조선사행에 참여한 역관을 지칭하기도 하였다. 통관은 회동관에 소속되어 조선사행에 대한 접대와 통역을 담당하기도 하고, 조선에 파견되는 중국사행에 대통관(大通官)·차통관(次通官) 등으로 참여하여 실무 외교 활동을 하였다.

명대는 제독사이관관(提督四夷館官)을 두어 조선사행을 포함한 외국사행을 관장하였다. 특히 역관은 초기에는 국자생(國子生)을 활용하였다가 선덕(宣德) 연간에 관민의 자제로 충원하였으며, 한림원에서 관장하였다. 청은 숭덕(崇德) 이후에 조선 출신으로 청에 피로(被擄)되었다가 쇄환하지 못한 자들 가운데 대통관 6명과 차통관 8명을 뽑아서 예부에 원적(原籍)을 두고 직책을 담당하도록 하였다. 이후 이들의 후손이 지속적으로 조선 관련 업무에 활용되었다. 청나라 사행은 통관 2명씩을 임명하여 보냈으며, 회령개시에 1명을 파견하여 교역을 감독하도록 하고, 봉황성에 차통관 2명을 번갈아 보내어 거주하면서 개시(開市) 등의 일을 감독하도록 하였다.

청대 조선사행의 역관은 청의 관제에 따라 대통관, 차통관, 근수통관(跟隨通官), 관주통관(管廚通官), 전참통관(前站通官), 방물압령통관(方物押領通官) 등으로 불리었다. 이들 직책은 당상역관(堂上譯官), 상통사(上通事), 차상통사(次上通事), 통사(通事), 압마통사(押馬通事), 압물통사(押物通事), 타각부(打角夫), 감주통사(監廚通事) 등 조선사행의 정식 직책명과 차이가 있었다.

통관은 회동관 관원으로 조선사행에 대한 접대와 통역 업무를 담당하였다. 조선의 역관이 통역 업무를 전담하면 이를 감시하고 규제할 수 없기 때문에 중국 역관을 별도로 두어 정확한 통역 여부를 확인하였다. 조선사행에 대한 접대뿐만 아니라 중국사행 파견 시 역관으로 참여시켜 통역을 관장하도록 하였다. 명대는 이들 역관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이 없지만, 청대는 병자호란 이후 조선 출신 청국인을 역관으로 활용하였다. 미천한 출신으로 전쟁 이후 청의 관원으로 출세하였다는 점에서 통관은 대체로 조선에 대한 외교 업무에 부정적인 영향을 많이 미쳤다. 대표적인 인물이 인조~효종대 악명을 떨쳤던 역관 정명수(鄭命守), 이일선(李一善)과 같은 인물이 있다.

조선시대 청나라 사행은 상사(上使), 부사(副使), 대통관 2명, 차통관 2명, 필첩식(筆貼式) 등이 정식 사행원이었으며, 근역(跟役)을 상사는 8명, 부사는 6명, 통관은 각각 1명을 대동하였다. 조선은 외교 활동의 일환으로 실무 외교관이었던 통관을 정식 사행원으로 인식하고, 별도의 공간을 마련하고, 각종 접대 물품을 규정하였다.

참고문헌

  • 『통문관지(通文館志)』
  • 『동문휘고(同文彙考)』
  • 김경록, 「조선시대 대중국 외교문서의 접수·보존체계」, 『한국사연구』 136, 2007.
  • 김경록, 「조선시대 사신접대와 영접도감」, 『한국학보』 117, 2004.
  • 김경록, 「조선초기 대명외교와 외교절차」, 『한국사론』 44, 2000.
  • 김경록, 「조선초기 통사의 활동과 위상변화」, 『한국학보』 101,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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