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장(紙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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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의 관서인 조지서(造紙署)나 지방의 관아에 소속되어 종이를 만드는 장인.

개설

우리나라 종이는 고려시대부터 고려지(高麗紙)라 불리며 중국에 조공용으로 많이 보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면 조공용 뿐 아니라 각종 서책을 인쇄하기 위해 다량의 종이가 필요하였다. 이에 국가에서는 중앙 관서인 조지서와 지방관아에 지장(紙匠)을 소속시키게 되었다. 1412년(태종 12) 조지소(造紙所)를 설치하였다가 1446년(세조 12)에 이름을 고쳐 조지서로 개편하였다. 이후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의하면 조지서에 경공장인 지장 81명을 두었으며, 외공장으로 5개 지방에 지장 698명을 두었다. 조선후기까지 조지서는 세검정 지역에 존속되어 있었다.

신분

『경국대전』 「공전」 ‘경공장’조에 의하면 조지서로 개편된 이후 소속 지장은 81명이었다. 종이를 만드는 일은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작업이어서 지장과 함께 부역자나 지방의 선상노(選上奴)를 동원하여 함께 작업하도록 하였다. 자비노[差備奴] 90명, 근수노(根隨奴) 5명의 인원이 정해져 있었다. 『경국대전』 「공전」 ‘외공장’조에 의하면 지장 698명은 충청도에 130명, 경상도에 256명, 전라도에 237명, 강원도에 33명, 황해도에 39명 등 5개 도에 소속되어 있었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지장은 장적(匠籍)을 작성하여 본조와 본사, 본도, 본읍에 간직하였다. 공장의 자격에서 사천(私賤)은 제외시켜 이들은 장인이 되지 못하였고, 장인은 나이가 60세까지 부역을 했다. 조선전기에 신설된 관영 수공업에 종사하는 장인은 신분적으로 공노비(公奴婢)가 가장 많고, 다음으로 일부 양인(良人)으로 구성되었다. 공노비의 장인과 양인 신분 장인으로 부족할 경우 15세기 초, 방대한 규모의 사찰 정리 과정에서 발생한 승려와 사찰 노비, 죄인들로써 노동력을 보충하였다. 결국 관영 수공업에 종사하는 장인의 신분은 크게 관노화된 사찰 노비와 신분상 양인으로서 천인의 역을 지게 되는 신양역천(身良役賤)의 장인 두 부류로 구분된다. 조지서의 장인으로는 지장과 함께 목장(木匠)과 염장(簾匠)을 함께 소속시켜, 종이를 떠내는 시설이나 도구를 자체 제작하여 조달하게 하였다. 이러한 장인들과 함께 선상노라든지 도역자(徒役者)를 도침군(濤砧軍)이란 명목으로 조지서에 배속시켜 일정 기간 동안 신역(身役)으로 죄과를 치르도록 하였다.

『경국대전』과 달리 1745년(영조 21)의 『속대전(續大典)』에 의하면 각사의 장인에 대해서는 안을 작성하여 공조 또는 본사에 갖추었다가 가장 요긴한 장인이 결원이 있으면 군사 보졸, 관속 또는 공천을 불구하고 적합한 인물로써 이를 보충하였다. 『속대전』 시기에는 장적(匠籍)을 공조와 본사에 국한해서 보관했고, 장인 중 결원이 생기면 공·사천을 불구하고 적임자를 보충하였다.

담당 직무

종이는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릴 때도 사용하지만 국가적으로 인쇄용과 조공용으로 수요가 많았다. 경공장이나 외공장이었던 지장은 국가에 필요한 종이를 제작하였다.

첫째, 국가적인 서책 출판용 종이를 생산하였다.

둘째, 중국에 조공용으로 보내는 종이를 제작하였다. 우리나라의 종이는 고려 때부터 품질이 우수하여 고려지로 불리며 중국에서 널리 애호되어 수요가 많았다. 긴 닥나무 섬유질을 두드려 만들어 종이의 표면이 질기고 매끈한 성질이 있었기 때문이다. 곧 송나라 때 화가 미불(米芾)은 고려지 위에 그림을 그린 적이 있고, 금나라 황제 장종(章宗)도 고려의 종이를 요구하였다.

셋째, 지역마다 토산품으로 특수한 종이를 제작하였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토산’조에 의하면 충청도의 마골지(麻骨紙), 전라도의 고정지(藁精紙), 강원도와 경상도의 유목지(柳木紙) 등이 공납되었다.

변천

고려시대에는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종이를 농민들에게 공납을 받았으며 동시에 양질의 종이를 생산하는 특수 집단인 지소(紙所)를 두었다. 그러나 국가에 예속된 지소의 소민(所民)에게 지나치게 많은 종이를 생산하도록 요구하였기 때문에 고려전기부터 유랑민이 발생하기 시작하여 고려후기에 이르면 지소는 해체되기에 이른다.

조선시대에 인쇄술의 발달에 따라 종이의 수요가 늘자 고려시대에 지소가 있던 특산지를 개편하여 중앙과 지방에 각각 관서를 설치하게 되었다.

조선초기에 각종 서적의 편찬이 증가하여 종이의 수요가 늘었다. 이에 조정에서는 고려시대 이래의 지소를 개편하여 1412년에 호조 산하의 중앙 관아인 조지소를 설치하였다(『태종실록』 12년 11월 28일). 그러다가 1431년(세종 13)에 저화(楮貨)를 생산하기 위해 호조 산하의 아문에 조지소가 편입되었다(『세종실록』 13년 3월 8일). 세종 때에는 『자치통감(資治通鑑)』을 비롯한 각종 서적의 편찬이 많아져 조지소의 책임과 사무가 과중하여 관원을 증원하였고(『세종실록』 13년 1월 20일), 1466년(세조 12) 대대적인 관제 개편으로 조지소를 호조 소속에서 공조의 아문으로 편입시키고 조지서로 개명하는 등 조직을 확대 개편하면서 인력과 시설을 확대하였다(『세조실록』 12년 1월 15일).

종이의 수요가 많아져 지장의 숫자도 불어났다. 1460년(세조 6)에는 지장이 74명이었으나(『세조실록』 6년 8월 1일), 제도가 완비된 『경국대전』 「공전」 ‘경공장’조에는 지장 81명이 소속되어 경공장 가운데 단일 직종으로 가장 많은 숫자였다.

15세기 후반을 지나면서 공납의 폐단으로 인해 조지서 소속 지장에 대한 처우가 열악해지면서 종이를 생산하는 능력도 떨어졌다. 임진왜란 이후 지장이 제대로 확보되지 못해 조지서의 복설(復設)이 늦어졌다. 1626년(인조 4) 홍서봉이 올린 계문에 보면, 임진왜란 이전에는 지장 81명과 도침군 60명이 있었으나, 지금은 지장 4명과 도침군 5명이 있을 뿐이라고 했다. 장인에게 지급할 급료는 감소되었고 소요량에 비해 생산 인력이 적어 지장 개개인의 노동 강도도 과중하여졌으므로 종이 만드는 일은 점점 회피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다가 숙종대부터 점차 조선전기의 수준으로 회복되어 1713년(숙종 39) 7월에 조지서 장인은 99명으로 정해졌다. 여기에는 지장과 도침군, 사찰의 승려[義僧]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 승려들은 종이를 뜰 수 있는 기능을 가진 장인이었는데 국역을 피해 사찰로 갔던 것이다.

1753년(영조 29) 공납의 폐해를 바로잡기 위해 만든 공폐이정(貢弊釐正)에 의하면 당시 50여 명의 조지서 지장이 거의 다 흩어지고 7∼8명이 겨우 남아 그 형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더욱이 1756년(영조 32)에는 조지서 서원이 고직 1명과 사령 1명이어서 『경국대전』에 서리 8명이었던 것과 비교된다. 이에 진휼청과 병조에서는 한시적으로 조지서에 재원을 대여해서 지장들의 급료를 지급토록 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지장의 생계를 안정시키고 이를 바탕으로 조지서의 생산 활동도 독려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입역 지장과 승도에게 급료를 제대로 주지 않자, 1765년(영조 41)에 지장들이 흩어졌다. 하지만 『경국대전』에 정해진 공장 규정은 『속대전』이나 『대전통편(大典通編)』, 『대전회통(大典會通)』에도 사문화된 채 그대로 유지되었다.

한편, 지방의 각 지역에는 종이를 생산하는 지방 관사에 외공장을 두었다. 『경국대전』 「공전」 ‘외공장’조에 의하면 27종목 3,656명에 달하는 외공장 중 지장은 692명으로 전체 외공장의 18.9%에 달해 단일 장색으로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다. 각 도의 지장은 충청도 52군현 126명, 경상도 67군현 260명, 전라도 53군현 234명, 강원도 25군현 34명, 황해도 24군현 38명으로 모두 221군현에 총 692명이었다.

조선후기에는 외공장의 장적을 본도에 비치하지 않고 그때마다 사장(私匠)을 활용하였다. 또 관에서 사역이 발생할 때마다 부역보다는 임금을 지불하고 사공을 고용하는 임금 노동 형태로 변화하였다. 그 결과 1865년의 『대전회통』에 의하면 지장의 숫자는 충청도 131명, 경상도 260명, 전라도 236명, 강원도 33명, 황해도 38명이어서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1618년에 『승평지(昇平誌)』를 작성할 때에 지장은 4명이었는데, 1729년에 『신증승평지(新增昇平誌)』를 작성할 때에는 1명만 남아있었다. 조선초기에 나주에 10명, 광주에 3명이던 지장은 18세기에는 각각 1명만 남아 그 숫자가 줄어들고 있었다. 이처럼 지장의 숫자는 시대가 내려가면서 점차 줄어들었지만, 종이는 국가적으로 중요한 물품이어서 1866년까지 조지서의 체제는 유지되었다.

조선후기에 지장들은 1680년부터 1907년까지 왕실의 족보인 선원보첩(璿源譜牒)이나 선원록(璿源錄)을 수정하는 교정청(校正廳)에 징발되었다. 교정청에 차출된 지장들은 종부시(宗簿寺) 소속으로 그다지 많지 않았다. 18세기 초에는 도감마다 2~3명을 동원하였으나, 18세기 후반에는 8∼10명을 동원한 것으로 보아 시기가 내려가면서 왕실 족보의 제작 물량이 많아졌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지장은 대부분 한두 도감에 단발로 차출되었고, 그나마 여러 도감에 중복 동원되는 경우는 드물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속대전(續大典)』
  • 『대전통편(大典通編)』
  • 『대전회통(大典會通)』
  • 『승평지(昇平誌)』
  • 송찬식, 『이조후기 수공업에 관한 연구』, 서울대학교 출판부, 1983.
  • 장경희, 『의궤 속 조선의 장인』, 솔과학, 2003.
  • 김삼기, 「조선후기 제지 수공업 연구」, 중앙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3.
  • 이광린, 「조선초기의 제지업」, 『역사학보』 10집, 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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