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위사(問慰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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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중국에서 파견된 사신이 왕래 도중 이상이 생겼을 때 위로하기 위하여 파견된 관원.

개설

문위사는 중국에서 파견된 사신에게 이상이 생겼을 때 조선에서 파견하는 관원으로 당상관 이상을 차출하였다. 중국 사신에게 병이 생기거나, 날씨가 지나치게 추운 경우 등에 파견되었다. 이 밖에 중국 황실에 비상사태가 있을 때도 파견되었다. 이들과 별도로 당하관이 파견되는 경우에는 문위관(問慰官)이라고 하였다.

담당 직무

문위사는 중국에서 파견된 사신이 중간에 질병이나 혹은 사신의 행보에 문제가 생겼을 때 승정원에서 선발해 파견하였으며, 중국 사신을 위로하기 위한 것이 주목적이었다.

문위사는 당상관 이상에서 차출하였다. 문위사가 파견된 사례는 다양하였다. 1858년 청국에서 조선에 파견된 사신이 서울로 들어오는 길에 감기가 걸렸다 하여 문위사를 파견해서 위로하였다(『철종실록』 9년 2월 1일). 1539년(중종 34)에는 사신 영접을 위한 일환으로 평양에서 산대놀이를 하다가 화재가 발생하자 문위사를 파견하였고(『중종실록』 34년 4월 8일), 날씨가 지나치게 추울 경우(『명종실록』 1년 1월 18일)에도 문위사를 파견하여 위로하였다. 한편 중국 황실 내에 비상 상황이 발생하였을 때도 문위사라는 이름으로 관원을 파견하기도 하였다(『명종실록』 12년 6월 16일).

한편 문위사와는 별도로 중국 사신에 대하여 문위관이라는 직함을 띠고 당하관 관원이 파견되는 경우도 있었다. 중국 사신이 병이 있으면 이조에서 예조 정랑 중 1명을 차출해 문위관으로 파견하였는데, 이때는 중국 사신 모두를 위문하지 않고 병이 있는 사신만 위로하고 돌아왔다. 이 밖에도 중국 사신이 조선에 왔을 때 절일(節日)을 만나게 되면, 중국 사신이 머물고 있는 해당 도(道)의 당하관수령을 예조 정랑으로 임시 직함을 주어 문위관으로 파견하기도 하였다. 이때 사신에게 예단을 지급하였다. 『통문관지』에 따르면, 예단의 지급 품목과 수량은 상사(上使)와 부사(副使)에게는 각각 홍주(紅紬)·녹주(綠紬)·백주(白紬)·백저포(白苧布) 각각 6필, 백면포(白綿布) 10필, 4유둔(四油屯) 2번(番), 상화지(霜花紙) 10권(卷), 백면지(白綿紙) 20권(卷), 우롱(雨籠) 6사(事), 선자(扇子) 20파(把), 채화석(彩花席) 6장(張) 등으로 규정되었다. 우롱의 경우는 백면지 12권으로 대신하였다. 일본의 대마도에 파견되는 역관(譯官)의 경우도 문위관이라는 직함을 파견되었다.

변천

문위사는 조선시대에 계속 존속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시행 과정에서 문위사를 파견하기에 앞서 낭청급 관원을 파견한 뒤에 이어서 당상관급의 문위사를 파견하기도 하였다(『철종실록』 9년 2월 3일). 한편 1712년 청나라에서 조선과의 국경 문제를 확정하기 위하여 파견된 목극등(穆克登) 등의 사신을 영접하는 관원의 명칭에 대하여 논란이 있었다. 이런 경우 보통 접반사(接伴使)로 호칭하였으나, 별견재신(別遣宰臣) 또는 문위사 등으로 개칭하자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결국은 별견중신(別遣重臣)이라는 명칭으로 정해졌다. 이 밖에 조미수호조약을 맺기 위하여 청나라 북양대신이홍장(李鴻章)과 막후교섭을 할 때도 고종의 명으로 천진에 문위사를 파견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 『통문관지(通文館志)』
  • 『은대조례(銀臺條例)』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