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지사(冬至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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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동지에 중국에 하례하기 위하여 정기적으로 파견된 사절.

개설

조선초기 중국에 매년 정례적으로 파견된 사절은 정조사(正朝使)·성절사(聖節使)·천추사(千秋使)가 있었다. 이 정례 사절 중 정조사는 1531년(중종 26)부터 동지사가 대신하여 정단(正旦)과 동지(冬至) 하례하기 위하여 파견되기 시작하였다. 1645년(인조 23)부터는 피차의 편의를 보아 날짜에 구애받지 않고 모두 정조(正朝)에 보내기로 하였으며, 1723년(경종 3)에 다시 강조되어 이후로는 정례적으로 세 사절이 동시에 출발하게 되었다. 이러한 정례 사행(使行)을 삼절겸연공사(三節兼年貢使), 혹은 동지사, 또는 절사(節使)라 불렀다. 이 사행은 동지를 전후하여 출발하여 그 해가 지나기 전에 북경에 도착하여 40~60일 묵은 다음 2월 중에 북경을 출발하여 3월말이나 4월초에 돌아오는 것이 통례였다.

담당 직무

동지사절의 구성은 시기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250명 내외가 대부분이고, 예외적으로 500명이 넘는 사행도 있었다. 대체로, 정사·부사·서장관 각 1명, 상통사 2명, 질문종사관 1명, 압물종사관 8명, 압폐종사관 3명, 압미종사관 2명, 청학신체아·의원·사자관·화원 각 1명, 군관 7명, 우어별차 1명, 만상군관 2명 등 정관(正官) 33명과 마부·노자 등 종인(從人)으로 구성되었다. 동지사의 정사는 정2품의 인원을 종1품으로 하여 차임하였고, 부사는 정3품의 인원을 정2품으로 임명하였다. 서장관은 정5품의 인원을 종4품으로 임명하였다.

사절이 출발하기 2~30일 전에 승문원에서 표·전문이 작성되고 호조에서는 예물을 준비하였다. 사신 일행은 산해관을 거쳐 북경회동관(會同館)의 옥하관(玉河館)에서 유숙하였는데, 명대에는 40일간, 청대에는 60일간 이곳에 체류하였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체류 기간이 정해져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옥하관에 입관한 이후 표문과 자문을 받들고 예부로 나가서 자문을 전달하고, 다시 의제사(儀制司)로 가서 황제에게 바칠 표문을 전달하였다. 또 홍로시(鴻臚寺)에 사신 일행의 황제 알현을 요청하는 보고 단자를 보내면, 홍로시에서 조회가 있기 전에 조하(朝賀)하는 의식의 절차를 조선 사신 일행에게 연습시켰다.

조회 당일에는 홍로시의 안내를 받아 대궐의 오문(午門) 밖에 기다리다가 황제가 봉천전에 도착하면, 조회에 참석하여 황제를 알현하였다. 조회가 끝나면 광록시(光祿寺)로 가서 접대를 받았다. 이후 가져간 예물을 예부에 보냈다.

예물은 황제에게는 여러 빛깔의 모시와 명주, 여러 색깔의 화석(花席) 및 백면지(白綿紙), 수달피, 인삼, 잡색마 등을, 황후에게는 나전소함(螺鈿梳函), 여러 빛깔의 모시와 명주 및 화석이었으며, 황태후에게는 황후와 같은 종류, 황태자에게는 여러 빛깔의 모시와 명주·화석·백면지, 수달피, 인삼 등을 보냈다.

변천

명 태조는 처음에 조선에 대하여 3년에 1회씩 조공(朝貢)의 예를 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도리어 1년에 3회씩 조공하겠다고 요청하였다. 『대명회전(大明會典)』에, 유구(琉球)는 ‘2년 1공(貢)’, 안남(安南)·섬라(暹羅)는 ‘3년 1공’, 일본은 ‘10년 1공’으로 규정하여, 중국과의 친소(親疎) 관계에 의하여 그 조공의 횟수를 정하였다. 이것은 정기적으로 사절을 보내는 횟수를 의미하였다.

고려와 조선에서 계속하여, 중국 측에 ‘1년 3공’을 요청하였으나, 명 태조는 이를 허락하지 않고 안남과 섬라와 같이 ‘3년 1공’을 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명 태조가 죽고 그 손자 건문제(建文帝)가 즉위한 1400년(정종 2)부터 조선과 명의 관계가 호전되자, 비로소 조선 측이 주장한 ‘1년 3공’이 시작되었다. 이 뒤부터 양국 사이에는 ‘1년 3공’의 정례적인 사절 파견이 점차 규례화 되었다. 이것은 명대(明代)에 중국에 입조(入朝)한 주변의 여러 나라 중 조선에만 허용된 특례였다. 그러나 양국 사이에는 이러한 ‘1년 3공’의 정기적인 사절 외에도 비정기적인 사절이 더 많이 왕래하였다.

동지사는 1531년(중종 26)부터 파견한 사절이었다. 또한 이때의 동지사는 정조사와 겸하여 사절의 명칭을 동지사로 개칭된 것이었다. 따라서 조선시대의 정기적인 사행은 ‘1년 3공’이었다. 이 정기적인 사행을 삼절사(三節使)라고도 하였다.

이 정례적인 사행은 1645년(인조 23)부터 피차의 편의를 보아 날짜에 구애받지 않고 모두 정조(正朝)에 보내기로 하였으며, 1723년(경종 3)에 다시 강조되어 이후로는 동시에 시행되었다.

의의

조선시대 중국과의 교류는 대부분 사행을 통해 이루어졌다. 이들 사행을 통하여 조공물(朝貢品)이 바쳐지고 중국에서도 이에 답하여 회사물(回賜物)이 보내져 왔다. 조공물은 마필(馬匹)·인삼·피물(皮物) 등이었고 회사물은 비단·자기·약재·서적 등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였다.

조선은 사행을 통하여 경제적인 교역 이외에도 학술·문화 교류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당시 중국에 사신으로 파견되는 인물은 대부분 뛰어난 학술적 식견을 지니고 있어서 중국의 지식인들과 활발하게 교류할 수 있었다.

또한 당시 최신의 서적이나 각종 서화(書畵), 지도 등을 구득(求得)하여 중국의 선진문물을 수용하려고 노력하였고, 이를 통하여 열린 세계를 이해하려고 하였다. 그 결과로 조선적인 특색을 지닌 문화로 발전·심화할 수 있었으며, 천문·역법 등 중국에서 전래된 서양의 과학기술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특히 18세기 후반 연행(燕行)하였던 북학파 학자들은 중국의 문화와 신학문적인 서학(西學) 등 많은 신문물을 수용하고, 이를 바탕으로 조선의 변화와 발전을 도모하게 되었던 것이다.

참고문헌

  • 『대전회통(大典會通)』
  • 『통문관지(通文館志)』
  • 『만기요람(萬機要覽)』
  • 김구진, 「조선전기 한중관계의 시론-조선과 명의 사행과 그 성격」, 『홍익사학』 4, 홍익사학회, 1990.12.
  • 김송희, 「조선초기 대명외교에 대한 연구-대명사신과 명 사신 영접관의 성격을 중심으로-」, 『사학연구』 55·56, 1998.10.
  • 박성주, 「조선초기 遣明 使節에 대한 一考察」, 『경주사학』 19, 경주사학회, 2000.
  • 박성주, 『高麗·朝鮮의 遣明使 硏究』, 동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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