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주장(燔珠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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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가루를 구워서 옥 모양으로 만드는 장인.

개설

번주장(燔珠匠)은 돌가루를 구워서 구슬[玉] 모양으로 만드는 장인으로 주장(珠匠)이라고도 불렀다. 장인이 만든 옥은 번주(燔珠)·번옥(燔玉)·번조옥(燔造玉)·약옥(藥玉)이라고도 하며, 그 광택에 따라 번청옥(燔靑玉)·번백옥(燔白玉)·번수정(燔水晶) 등으로 구분되었다. 번조옥은 세종 때 당상관 이외에는 사용을 금지하였다(『세종실록』 24년 9월 25일).

담당 직무

번주장이 만든 옥은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의하면 조선시대 왕이나 관원의 조복(朝服)·제복(祭服)·공복(公服)에 차는 패옥(佩玉)에 사용되었다. 이러한 패옥은 『국조오례의서례(國朝五禮儀序例)』에 의하면 중국의 명나라의 복식에서 유래한 것이지만, 조선의 관원은 3품 이상은 번청옥, 4품 이하는 번백옥을 사용하여, 늘어뜨리는 수조(綬組)에 여러 개의 주옥을 꿰어 만들었다.

변천

구슬은 삼국시대부터 귀족들이 유리 목걸이로 장식하였는데 신라에서는 진골 귀족만이 사용할 수 있던 귀한 신분의 표식이었다. 신라에서는 중국에서 유리구슬을 수입하다가 자체에서 생산하게 되었다. 그중 황남대총의 남분이나 안계리 4호분에서 나온 유리그릇이나 송림사 전탑의 사리병 등이 신라에서 제작한 것으로 여겨진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조선시대 공조에는 주장이 2명 소속되어 있었다. 구슬을 옥 모양으로 만드는 번주장은 옥장(玉匠)이 하기도 했다. 1707년에 간행된 『전록통고(典錄通考)』나 1785년 간행된 『대전통편(大典通編)』 같은 법전에는 여전히 변화 없이 공조에 주장 1명이 소속되어 있었다. 그러나 1865년 간행된 『대전회통(大典會通)』에는 주장 4명이 소속된 것으로 그 숫자가 2명이 증가되어 있었다. 그밖에 다른 기록은 찾을 수 없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통편(大典通編)』
  • 『대전회통(大典會通)』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 한우근 외 역;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인문연구실 편, 『(역주)경국대전: 주석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7.
  • 이한상, 「적석목곽분 출토 황금장식과 유리제품의 원류」, 『신라문화』 23,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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