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자향로(靑磁香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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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자로 만든 향을 피우는 용기.

개설

청자향로(靑磁香爐)는 1477년(성종 8)에 유구국(琉球國) 왕 상덕(尙德)이 내원리주(內原里主) 등을 보내어 내빙(來聘)하였을 때 종수기청자(種樹器靑磁)와 함께 조선 왕실에 바친 물품 중 하나이다(『성종실록』 8년 6월 6일).

연원 및 변천

15세기에는 유구국과 일본 구주(九州), 축주(竺州), 비주(肥州) 등지에서 사신이나 상인 등을 보내어 조선 왕실에 각종 물품과 청자를 진상하였다. 이들 나라에서 진상한 청자는 모두 중국 용천요(龍泉窯)·경덕진요 등지에서 제작된 명대 자기였는데, 명나라와 무역을 통해 수입한 것을 다시 조선 왕실에 진상한 것이다. 15세기에 조선 왕실에 전래된 중국 자기는 명나라의 외교 사절단이 가져오는 경우와 유구나 일본 사신들이 바친 물품에 포함된 예로 나누어진다. 명나라 사신들은 주로 백자나 청화백자를 가지고 온 반면에 유구나 일본의 경우에는 청자가 주를 이루었다. 15세기에서 16세기경에 유구와 일본에 유입된 명대 청자는 유구를 통해서 수입된 것이었다. 당시 유구는 명나라·조선·일본·동남아시아를 연결하는 중계무역을 주도하는 세력이었으며, 명대 용천요 청자는 유구와 명나라의 중요한 교역품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유구국 사신이 조선 왕실에 청자를 바친 시기는 1418년(세종 즉위), 1431년(세종 13), 1477년(성종 8), 1480년(성종 11), 1494년(성종 25)이 확인된다. 명나라 황실에서 전해진 자기는 주로 주기(酒器)·다기(茶器) 등 음식기가 많았지만, 유구에서 진상된 청자는 화병(花甁)·종수기(種樹器)·향로(香爐)·주해(酒海)·수기(嗽器) 등 다양한 생활 용기가 많은 것이 특징이다(『성종실록』 8년 6월 6일), (『성종실록』 11년 6월 7일). 최근 청진동·공평동 등지의 서울 시내 발굴 과정에서 15세기 명대 청자가 적지 않게 출토되었으며, 출토된 청자의 품질 등으로 미루어볼 때, 용천요뿐만 아니라 복건성 등지의 가마에서 제작된 청자도 유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형태

청자향로의 형태는 매우 다양해서 당시 어떤 형태의 향로가 유입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세종실록』「오례(五禮)」 흉례서례(凶禮序例) 명기(明器)에 남아있는 향로 그림과 설명을 통해서 어느 정도 추정할 수 있다. 향로 그림 밑에 부연된 ‘자기양이유개(甆器兩耳有蓋)’라는 설명을 통해, 자기로 제작되었으며, 양쪽에 두 개의 귀가 달려있고, 뚜껑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향로 그림은 둥근 몸체에 세 개의 다리가 달려 있고, 뚜껑도 반원형으로 보주형 꼭지가 부착되어 있어서 15세기에 자기로 제작된 향로의 형태를 알 수 있다. 이와 유사한 형태의 청자향로는 원나라 말과 명나라 초에 용천요에서 제작되었다.

생활·민속 관련 사항

1423년(세종 5)에는 봉상시(奉常寺)에서 만든 원단(圓壇)에서 사용하는 보(簠)·궤(簋)·대준(大尊)·상준(象尊)·호준(壺尊) 등 모든 제기를 자기로 제작하였는데, 향로도 포함되었다(『세종실록』 5년 10월 27일). 당시에 자기로 만든 향로를 제례나 각종 의례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15세기 이후에도 백자로 제작되어 사용된 예가 적지 않게 남아있다.

참고문헌

  • 방병선, 『왕조실록을 통해 본 조선도자사』, 고려대학교출판부, 2005.
  • 김영미, 「朝鮮時代 官窯 靑磁 硏究」, 『미술사학연구』 266, 한국미술사학회,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