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식(戶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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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조에서 규정한 곡물 간의 교환 규정.

개설

환곡은 쌀로 분급하였지만 흉년 등으로 인하여 쌀로 갚을 수 없을 때 다른 곡식으로 징수하기도 하였다. 쌀과 보리 등은 곡물의 가치가 달랐기 때문에 정확한 교환 비율을 규정할 필요가 있었다. 이를 위하여 호조(戶曹)에서 쌀과 다른 곡물 간의 교환 비율을 정하였는데 이를 ‘호조식(戶曹式)’ 혹은 ‘호식’이라 하였다(『고종실록』 15년 7월 19일).

제정 경위 및 목적

기근이 들면 제때에 모내기를 하지 못하여 다른 곡물을 파종하는 경우가 생겼다. 이미 환곡은 쌀로 받았는데 농사로는 다른 곡물을 재배하였을 경우, 가을에 환곡을 징수할 때에는 쌀로 하지 않고 수확한 다른 곡물로 납부하게 하였다. 이런 것을 ‘대봉(代捧)’이라 하였다. 그러나 쌀과 벼·콩 등은 곡물의 가치가 달랐기 때문에 정확한 교환 비율을 규정할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곡물 간 교환 비율을 호조식이나 호식으로 불렀다. 호조의 규정과는 달리 함경북도 지역에서는 그 지역에서만 통용되는 곡물 교환 비율이 있었는데 이를 ‘토식(土式)’이라 하였다(『순조실록』 16년 6월 13일).

내용

곡물의 교환 비율이 법제적으로 확정된 것은 1746년(영조 22) 『속대전』의 규정에서였다. 『속대전』 「호전」 창고 조에서는 재해를 만난 해에는 환곡을 다른 곡식으로 대신 납부하도록 하면서 각 곡식의 교환 비율을 규정하였다. 쌀 1석에 콩은 2석, 벼[租]는 2석 7두 5승, 팥은 1석 7두 5승을 교환하고, 팥 1석에 콩은 1석 4두, 찧지 않은 조[粟租]는 1석 5두를 교환하고, 콩 1석에 팥은 11두 2승 5홉, 찧지 않은 조는 1석 3두를 교환하고, 벼 1석에 콩은 12두를 교환하게 하였다. 핍쌀[稷米]과 기장쌀[黍米], 녹두와 팥, 옥수수[稷唐]와 거친 벼[荒租], 밀[眞麥]과 벼[正租]는 같은 양으로 갚게 하였다. 쌀과 좁쌀은 같은 비율이고, 좁쌀을 쌀로 갚을 때는 이자를 줄여 주도록 하였다.

『속대전』과 정조대 편찬된 『대전통편』, 그리고 고종대에 편찬된 『대전회통』과 달리 1808년(순조 8)에 편찬된 『만기요람』에서는 일부 다른 비율이 나타나고 있다. 『만기요람』에서는 팥 1석에 콩은 1석 5두, 찧지 않은 조는 1석 10두를 교환하고, 콩 1석에 찧지 않은 조는 1석 3두 7승 5홉을 교환한다고 기록하고 있어 그 액수가 조금 증가하였다.

이러한 규정과는 달리 실제 운영에서는 곡물 간의 곡물 교환 비율을 무시하고 벼와 작곡을 1:1의 비율로 교환하는 단대봉(單代捧)이 시행되기도 하였다(『정조실록』 1년 6월 29일). 또는 함경북도 지역에서는 오랫동안 시행해 관행이 된 토식을 시행하기도 하였다. 함경도의 삼수(三水)·갑산 지역에서는 호조식(戶曹式)·토식·본토식(本土式) 3가지 형태의 대봉(代捧)이 시행되어서 겉곡식 1석에 쌀 3두·4두·5두의 비율로 교환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복잡한 곡물 교환제도 때문에 환곡을 운영하는 아전층이 환곡을 나누어 줄 때에는 호조식으로 하여 적은 양을 분급하고 거두어들일 때에는 토식으로 하여 많은 양을 징수하는 폐단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속대전(續大典)』
  • 『만기요람(萬機要覽)』
  • 양진석, 「18·19세기 환곡에 관한 연구」, 『한국사론』 21,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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