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곡(義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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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량을 위하여 민간에서 모아 바친 곡식, 또는 돌려받지 못한 환곡을 다른 사람들에게 징수한 곡식.

개설

임진왜란 때에 군량을 조달하는 과정에서 의병이 납부한 곡식을 의곡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의곡을 바치고 상직(賞職)을 받았으므로 사실상 납속책(納粟策)의 한 종류로 시행되었다(『선조실록』 26년 3월 1일). 17세기에는 징수할 대상자가 없는 환곡을 거두기 위하여 남아 있는 사람에게 균등하게 징수한 것을 의곡이라 하였다(『효종실록』 8년 1월 17일).

제정 경위 및 목적

변란이나 흉년 시에 재정 확보를 목적으로 국가에서 일시적으로 일정한 특전을 내걸고 소정의 곡식이나 돈을 받는 것을 납속(納粟)이라 하였다. 납속은 임진왜란 때에 군량미의 조달이 매우 어려워지자 식량을 모으기 위한 임시변통책으로서 대규모로 시행되고 제도화되었다. 의곡은 ‘의병이 군량을 보충하기 위하여 자발적으로 납부한 곡식’이란 의미를 부여해 납속과는 구분하려 하였다. 그러나 의곡을 바치고 그 대가로 상직을 받았으므로 의곡 역시 넓은 의미의 납속책이었다. 17세기에는 징수할 대상자가 없는 환곡을 거두기 위하여 남아 있는 사람에게 균등하게 징수한 것을 의곡이라 하였다.

내용

임진왜란이 발생한 이후 최초의 납속은 1593년(선조 26)에 있었는데, 그때는 국역(國役)을 담당해야 하는 평민 인구의 감소를 막기 위하여 평민을 제외하고 향리(鄕吏)·사족·서얼만을 대상으로 하였다(『선조실록』 26년 2월 26일). 납부액에 따라 향리에게는 면천(免賤)에서 동반실직(東班實職)까지, 사족은 참하(參下) 영직(影職)에서 동반당상관(東班堂上官)까지, 서얼은 겸사복(兼司僕)에서 동반6품까지의 직(職)과 위계(位階)를 주었다. 1592년 전라도에서 사민(士民)이 의곡을 모아 바닷길로 선조가 있는 의주에 운반한 사례가 보이며(『선조수정실록』 25년 11월 1일), 1593년 납속책이 시행되면서 의곡의 모집은 더욱 활발해졌다. 하지만 포상을 반대급부로 원하는 경우가 많았고, 의곡 납부자의 경우 포상이 지체되거나, 납속 규정대로 포상되지 않으면 실망하거나 원망하였다.

1624년(인조 2)에 경상도의 의곡을 서울로 운반해 국가 재정에 보충하려는 시도가 있었다(『인조실록』 2년 5월 5일). 이를 통해 볼 때 임진왜란 때에 만들어진 의곡은 일부 지역에서 계속 운영되었던 것 같다. 이후 1627년(인조 5)에 정묘호란이 발생했을 때에도 의곡을 모집하였고, 곡식을 바친 사람들을 포상하였다(『인조실록』 5년 11월 5일). 당시 의곡을 바친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실직(實職)을 모두 줄 수가 없어서 그 처리에 고심하였다. 당시 확보한 의곡은 각 고을에 유치해 두고 후일의 군비로 삼았다.

변천

1657년(효종 8) 황해도에서는 환곡 징수 문제로 여러 지방관이 매를 맞고 유배되는 사례가 발생하자 강압적으로 환곡을 징수하였다(『효종실록』 8년 1월 17일). 환곡을 받을 사람이 사망하였거나 도망해서 징수할 곳이 없는 경우에는 남아 있는 사람들의 재물을 부당하게 빼앗거나, 호수(戶數)를 따져 균등하게 거두면서 의곡이라 불렀다. 전쟁기에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납부한 곡식을 의곡이라 하다가, 징수할 대상이 사라진 환곡의 징수를 위하여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균등하게 징수한 곡식을 의곡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후자에는 관의 강제가 가해졌지만 형식적으로 ‘민간에서 자발적으로 곡식을 납부하였다는 의미’로 의곡이라 부른 듯하다.

참고문헌

  • 서한교, 「17·8세기 납속책의 실시와 그 성과」, 『역사교육논집』 15, 19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