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화적(明火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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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화도적(明火盜賊), 즉 횃불을 들고 떼를 지어 다니며 도둑질을 일삼던 화적 무리.

개설

명화(明火)는 불을 켠다는 뜻이고, 무기를 들고 다닌다는 집장(執仗)을 붙여 명화집장(明火執仗)이라고 하면 강도와 살생을 할 수 있다는 뜻이 된다. 명화적(明火賊)은 명화집장, 또는 명화도적의 준말이고, 이를 더 줄이면 화적(火賊)이다. 단순히 불한당이란 뜻으로도 쓰인다. 도둑의 무리로 횃불을 들고 습격하기 때문에 화적이라고 하였다. 화적의 규모는 시대를 내려오면서 더욱 커져 19세기 중반경에는 작게는 10여 명, 많게는 30~40명씩 떼를 지어 기마방포(騎馬放砲)하면서 전국 각지에 횡행하였다.

내용

다음은 1689년(숙종 15)에 마련한 16개 항의 구포절목(購捕節目) 중 앞의 10개 항목의 내용이다.

1. 도적을 체포하여 고한 자는 그가 공사천이면 면천시키고 도적의 재산을 모두 지급한다. 또 양민으로서 역이 있는 자는 신역을 없애주고 체포한 도적의 숫자를 계산하여 등급을 나누어 시상하되 많은 자는 미곡 20석과 베 30필, 적은 자는 미곡 10석과 베 20필을 지급하며 도적이 훔친 물건도 역시 지급한다. 양인으로서 신역이 없는 자는 일생 동안 잡역을 면제하며, 상에 있어서는 가자를 원하지 않고 미곡과 베 받기를 원하는 자에게는 잡은 도적의 수가 많은 자는 미곡 15석과 베 20필, 적은 자는 미곡 10석과 베 15필을 지급할 것임.

1. 도적의 소재를 가르쳐 준 자도 마찬가지로 논상하며, 도적 괴수를 체포하여 고한 사람은 원래의 상 이외에 별도로 시상할 것임.

1. 출신과 양반은 체포한 도적 숫자를 계산하여 전례대로 가자하거나 혹은 미곡과 베를 지급하되 그들의 소원에 따라 시행한다. 또 도적이 훔친 물건도 지급할 것임.

1. 적당 중에서 동료를 고발한 자는 면죄를 허락하고 상 주는 등의 일도 다른 사람의 규례에 의하여 거행할 것임.

1. 명화적의 무리는 법대로 처단할 것임. 기타의 도적들은 승복한 뒤에 비록 인명을 죽이지는 않았더라도 도적질한 물품의 다소를 계산하여 중한 자는 팔과 어깨에 도(盜) 자를 새겨 외딴섬에 귀양 보냄. 또한 재범으로서 중한 자는 효시(梟示)하고 가벼운 자는 노복으로 삼아 귀양 보낼 것임.

1. 각 고을에서는 믿을 만한 사람을 별도로 정하여, 각처의 시장과 관문 근처에서 물건을 매매할 때 의심나는 물건을 가진 자가 있으면 잡아서 관아에 보고하게 하고 그 출처를 추문하여 처치해야 한다. 그래서 그 물건이 도적의 장물이면 체포한 사람의 논상을 도적 체포한 자와 같이 한다. 만약 관아에서 정해 보낸 사람이 관령(官令)을 빙자하여 시장에서 폐단을 일으키면 각별히 엄형(嚴刑)에 처하여 폐단을 근절할 것임.

1. 지패(紙牌)의 제도를 다시 밝혀 만약 분실하여 자수한 자가 있으면 속전을 받지 말고 일일이 다시 만들어 주어야 함. 또 지패가 없는 자로서 체포된 자는 사목에 의거하여 죄를 결정하며 통수(統首)도 함께 죄를 줄 것임.

1. 거동이 수상한 사람이 통(統) 내에 와서 사는데도 고발하지 않았다가 그 뒤에라도 적당이 되었으면 그 통수는 한 차례 엄형을 가한 후에 귀양 보낼 것임.

1. 사나운 큰 도적떼가 경내에 일어났는데도 즉시 체포하지 않아 더욱 만연되게 하였으면 해당 수령과 토포사는 모두 잡아다 문초하여 죄를 다스리며, 좌수·형리·토포장은 한 차례 형장으로 추문하고 귀양 보낼 것임.

1. 근래 무뢰배들이 으레 시장에 모여 소와 말을 도둑질하여 마음대로 잡아먹으며 무리들을 불러 모아 그대로 도적떼가 됨. 지금 이후로는 각 고을의 관문 근처와 경내의 시장에서 금령을 범하여 체포된 자가 있으면 체포된 자는 법전대로 엄형하고 온 집안을 귀양 보냄. 수령이 금지시키지 못했다가 다른 일로 인해 드러나면 수령은 잡아다가 문초하고 죄를 결정하며 좌수와 형리는 엄한 형장을 가하여 귀양 보낼 것임.

이 절목을 보면 명화적을 단순 도적과 구분하여 엄히 다스리려고 하였고, 도적들의 장물 처분 장소가 시장과 관문이라고 판단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유수원(柳壽垣)은 『우서』(제8권)에서 상판(商販)의 사리와 액세(額稅)의 규제를 논의한 가운데 명화적이 더욱 성행하는 원인을 허시(虛市), 즉 지방 정기시장에서 찾았다. 즉 도적의 무리가 온갖 물건을 겁탈해서는 이를 장시에 흩어서 팔고 있는데, 동서남북에서 모인 사람들이 바로 그때 그 자리에서 사가기 때문에 뒤쫓아 잡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이다. 또한 장시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서울 종루의 입전(立廛)이나 서소문 밖의 조전시(朝前市)들 역시 난잡하여 같은 원인이 된다고 하였다.

변천

전통 사회에서 도적이 일어나는 것은 대부분 기근이 든 뒤의 빈궁한 생활 때문이다. 이때 사납고 흉악한 도적이 출현하여 유민(流民)이 많이 발생한 틈을 타서 그들을 끌어 모아 도당(徒黨)을 결성한 다음에 점차적으로 그 세력을 확대한다.

명화적은 조선초기에도 있었다. 1431년(세종 13) 4월 11일에 한성부에서 아뢰기를, “(한양) 수구문 밖 초막에서 명화적이 중 한 명을 쳐 죽이고 두 명을 부상시키고 재물을 다 탈취하였습니다.”라고 하니, 형조와 의금부와 한성부에 명하여 수색해 잡게 하고, 좌대언김종서(金宗瑞)에게 명하여 의금부 제조와 같이 강도의 진상을 추문(推問)하여 진무(鎭撫) 세 사람으로 하여금 각각 방패(防牌) 10명을 거느리고 체포하게 하였다(『세종실록』 13년 4월 11일).

조선중기는 아직 지방 장시가 발달하지 않은 시점이다. 그런데 명화적의 발생이 장시의 출현과 관계가 있다는 주장이 대두되었는데, 이는 장이 약탈의 표적이 되었기도 하지만 도적들이 훔친 물건들을 장에 내놓아 쉽게 처분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1546년(명종 1) 2월 21일에 이언적(李彦迪)은 형옥을 엄하게 다스릴 것과 장시를 없앨 것 등에 대해 아뢰면서 해마다 기근이 들어 도적이 더욱 성한데 호서·영남이 더욱 심한 이유를 장시를 금하지 않은 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후 명화적에 의한 침해는 더욱 심해졌고, 또 전국적인 현상이 되었다. 1619년(광해군 11) 9월 25일에 각 도에 명화적의 횡포가 있자 왕이 포도대장 등에게 신칙(申飭)하였다. 전교 내용은 명화적이 각 도 곳곳에서 도적질을 하고 있는데 특히 호남·호서와 경기 고을과 도성문 밖이 가장 심하다고 하였다.

숙종 연간에도 명화적에 의한 피해가 가장 큰 곳으로 경기도와 충청도를 들었다. 1689년(숙종 15) 12월 18일에 비변사에서는 명화적을 체포하기 위해 상금을 거는 현상 체포의 시행 세칙인 구포절목을 마련하였다. 18세기 중엽에는 이미 평양에 폐사군단(廢四郡團), 서울에 후서강단(后西江團), 유리걸식하는 백성들로 구성된 유단(流團), 재인(才人)들로 구성된 채단(彩團) 등 지역별, 계층별로 조직화한 집단들이 등장하였다.

18세기 후반에는 거사난(居士亂)이라고 부를 수 있는 천민층의 움직임이 전국적으로 있었다. 1811년(순조 11)의 홍경래난에는 수다한 유민들이 참가하고 있었다. 이들은 안정된 향촌을 두고 유리할 수밖에 없었던 가장 열악한 계층이었다. 19세기 후반 이후 유민화의 가속화로 확대된 화적 집단이 전국적인 조직을 정비함으로써 1900년경에는 활빈당이라는 대규모 도적 집단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의의

전통 사회에서는 평상시에도 농민층의 일부는 촌락을 이탈하여 유리표박하고 있었고, 특히 재해가 크거나 빈번해지면 그 수는 훨씬 불어났다. 그러나 조선후기에 들어오면 자연재해 외에도 인구 과잉에 따른 경작지, 특히 소작지 부족이 향촌에서 이탈하는 주요한 원인으로 등장하였다. 신분별로는 노비와 상민이 순차적으로 많이 이탈하였다. 그러나 도시가 발달하지 않았으므로 이러한 유리민들은 산간 오지나 변강 지역으로 흡수되거나 명화적과 같은 화적 집단을 이루어 체제를 위협하는 세력이 되었다.

참고문헌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우서(迂書)』
  • 배항섭, 「임술민란 전후 명화적(明火賊)의 활동과 그 성격」, 고려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86.
  • 한상권, 「18세기 전반 명화적(明火賊) 활동과 정부의 대응책」, 『한국문화』13, 1992.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