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산성(長壽山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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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도 재령의 장수산에 쌓았던 산성.

개설

황해도에 있는 수양(首陽), 구월(九月), 대현(大峴), 정방(正方)의 네 산 가운데 우뚝 솟아 있다. 험준한 요새지만 길 가운데 있어 백성이 집을 짓고 살 수 있는 곳이었다.

위치 및 용도

황해도 재령(載寧)에 있다. 사면으로 산이 둘러져 있고 암석이 험준했다. 매우 좁고 궁벽한 데다 산골짜기에 있어, 병사를 숨기기에는 좋을지 몰라도 적을 방어할 만한 요해처는 아니었다. 하지만 장수산성은 해주에 있는 수양(首陽)과 은율(殷栗)에 있는 구월과 그 밖의 서흥(瑞興)의 대현과 황주(黃州)의 정방 등이 모두 험준한 지세였으나, 그중에서도 특히 우뚝 솟아 있어, 입술과 이 및 볼뼈와 턱뼈처럼 서로 의지하는 형세였다. 장수산성은 길의 중앙에 위치해 있었는데, 돌로 된 산봉우리가 가파르고 험해 상·하 성으로 나누어 만들어졌다. 비록 험준한 요새지만 백성이 집을 짓고 살 수 있는 곳이었다. 장수산성은 적이 극성(棘城)을 경유한다면 반드시 장수산성 북쪽 모퉁이 길을 지나 평산(平山)의 태백성(太白城) 아래로 통해야 하니 적에게도 조선 침입 시 매우 중요한 길목이었으므로, 방어상 매우 중요하였다.

변천 및 현황

1627년(인조 5) 5월 수축했으며(『인조실록』 5년 5월 13일), 1733년(영조 9) 5월에도 수축하였다(『영조실록』 9년 5월 27일).

형태

성벽은 대부분 자연 절벽을 이용하였으며 산성의 사방에는 전망이 좋은 곳에 장대(將臺)를 두었다. 행궁 터와 집터, 제철지(製鐵址) 등이 있었으며, 험준한 지세를 이용한 난공불락의 요새로서 19세기 말의 조선시대까지 사용되었다.

관련사건 및 일화

1678년(숙종 4)에 황해감사박순(朴純)과 재령군수변황(卞榥)은 장수산성에서 조총을 몰래 무역해서 들이고 수진궁(壽進宮)에 잘 보이려는 뜻을 보이던 역관을 칭찬하는 치계를 올렸다가 파직당하였다(『숙종실록』 4년 8월 14일).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