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한단(司寒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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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한(司寒) 제사를 거행하던 제단(祭壇).

개설

사한은 추위를 관장하는 북방의 신으로 현명(玄冥) 또는 현명씨(玄冥氏)로도 불렸으며, 이 사한에게 지내는 제사를 사한제(司寒祭), 이를 거행하는 장소를 사한단이라 하였다. 고려시대부터 사한 제사를 국가 제사로 편입시켜 실행하였고, 조선도 고려의 제도를 이어서 건국 초기부터 관련 제도와 제단을 정비하여 실행하였다. 조선 전기부터 후기에 이르기까지 사한 제사는 큰 변동 없이 사한단에서 계속 설행되었다.

위치 및 용도

사한단은 남교(南郊) 두모포(豆毛浦)에 소재한 동빙고(東氷庫)의 북방에 위치하였다. 현재 서울 용산구 옥수동 산 1번지에 해당된다.

변천 및 현황

사한 제사는 중국에서 춘추시대 중반부터 설행되었고, 우리나라에서는 늦어도 고려시대부터는 국가 제례 체계의 소사(小祀)로 편입되어, 음력 10월 맹동(孟冬) 중 얼음을 저장하는 장빙(藏氷) 시기와 입춘(立春)의 개빙(開氷) 시기에 설행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1413년(태종 13)에 국가 제례 체계의 소사(小祀)로 분류·편입되면서 시행되기 시작하였고, 1424년(세종 6)에는 겨울의 실질적인 장빙 시기에 맞추어 설행 날짜를 합리적으로 조정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조선초기에는 사한단에서 사한 제사뿐 아니라, 매년 음력 4월에 비가 순조롭게 내리기를 기원하는 제례인 우사(雩祀)가 보다 자주 거행되었으며, 이때 추위를 관장하는 현명씨, 일명 사한신(司寒神)도 공동 제사 대상이 되었다. 사한 제사를 별도로 지내는 일은 상대적으로 적었고, 소홀하게 취급하는 경향도 없지 않았다.

이런 상태로 조선후기까지 이어지다가, 1767년(영조 43) 2월 21일에 좌부승지(左副承旨)유한소(兪漢蕭)가 상소를 올려, 우사제(雩祀祭)와 사한제는 모두 현명씨를 제사하는 의례인데, 우사에 비해 사한제가 그간 소홀히 다루어졌음을 비판하면서 이의 시정을 요청하였다(『영조실록』 43년 2월 21일). 영조가 이를 윤허하고 사한제를 소홀히 다루어 백성들이 혹한 피해를 입는 일이 없도록 당부한 뒤부터는 사한제의 비중이 보다 높아지게 되었다. 이후 사한단은 대한제국 시기 전까지 한파(寒波)에 의한 피해가 심할 때 날씨가 따뜻해지기를 기원하는 기온(祁溫), 겨울 기온이 예년보다 높아서 얼음이 잘 얼지 않거나 기타 각종 문제가 발생할 때 날씨가 추워지기를 기원하는 기한(祁寒), 겨울의 강수량이 부족하여 가뭄이 심할 때 눈이 내리기를 기원하는 기설(祈雪) 및 순조로운 장빙(藏氷), 개빙(開氷) 등을 기원하기 위해 주기적으로 제사를 지내는 제단이었다. 1908년(융희 2)에 칙령에 의해 폐지되었다.

형태

사한단은 영성에 대한 제례를 거행하는 영성단(靈星壇) 및 우사 제례를 거행하는 우사단(雩社壇)과 동일한 규격으로 조성되었다.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따르면 사한단과 영성단, 우사단은 넓이가 2장 1자(약 6.6m), 높이가 2자 5치(약 0.7m)이며, 사방으로 계단이 조성되어 있고, 제단의 주위를 낮은 토담으로 둘러쳤다고 한다. 사한신의 신좌(神座)는 제단의 북쪽에 설치하되 남향하도록 하였다.

참고문헌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 『춘관통고(春官通考)』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