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기산성(龍起山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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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당시 주변 지역 방비와 백성 보호를 목적으로 축조된 경상도 성주가야산의 산성.

개설

용기산성이라는 이름은 성안에 용기사(龍起寺)가 있기 때문에 붙여졌다. 최초의 축조는 삼국시대에 이루어진 것으로 추측되며, 임진왜란 기간에 총섭장(總攝將) 유정(惟政)에 의해 본격적으로 축조·관리되었다. 가야산을 중심으로 하여 인근의 고령(高靈)·거창(居昌)·합천(陜川) 지역을 방어하고 지역 주민들을 보호하는 것이 주 용도였다. 이후 숙종대에 인근에 독용산성이 수축됨에 따라 기능을 상실하고 퇴락하였다. 그리하여 현재 성벽의 둘레는 7,156㎞에 이르는 대규모급 성곽이지만 대부분의 성벽이 무너졌으며 일부 남아 있는 곳은 높이 1.5m 내외에 불과하게 되었다.

위치 및 용도

용기산성이 위치한 경상도 성주목은 대구부(大丘府), 고령현(高靈縣) 등과 인접한 지역으로, 특히 대구는 영남대로의 핵심 경유지이자 낙동강 수운의 중심지이기도 하였다. 또한 이곳의 명산인 가야산은 영남 내륙지방의 주요 거점으로, 고령·거창·합천 지역의 방어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이러한 가야산에 위치한 용기산성은 임진왜란 기간에 왜군이 영남 내륙지방으로 대거 들어옴에 따라 군사적으로 중요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 용기산성은 성주 및 주변 고을 방어하고 백성을 산성으로 들여보내 보호하는 것이 주 용도였다. 성주의 용기산성 이외에도 합천의 이숭산성(李崇山城), 삼가(三嘉)의 악견산성(岳堅山城) 등이 용기산성과 함께 영남 내륙 방비 및 백성 보호의 역할을 맡았다. 그러나 숙종대에 인근 지역에 독용산성(禿用山城)이 수축됨에 따라 용기산성은 그 기능을 독용산성에 넘겨주게 되었다.

변천 및 현황

용기산성은 삼국시대에 축조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세종실록』「지리지」에 가야산석성(伽倻山石城)이라는 이름으로 언급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전기에는 성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중종대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지금은 반쯤 퇴락하였다”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이미 폐성(廢城)이 되어 16세기부터 임진왜란 전까지는 성의 역할을 하지 못한 것으로 생각된다.

임진왜란의 와중에 경상도의 군대를 위무하기 위해 파견되었던 교리(校理)권협(權悏)이 곽재우(郭再祐)의 조언에 따라, 총섭장(總攝將) 유정(惟政)으로 하여금 승도(僧徒)를 모아 다시 용기산성을 수축하도록 할 것을 주장하였다(『선조실록』 27년 2월 27일). 이후 체찰사(體察使)이원익(李元翼)이 조정의 명을 받아 승장(僧將) 신열(信悅)을 시켜 용기산성을 개축함에 따라, 비로소 용기산성은 산성으로서 기능하기 시작하였다. 산성이 다시 축조된 이후에는 비변사의 요청에 따라 성안에 창고를 설치하여 그 안에 관곡(官穀)을 저장하고, 주변에 사는 백성들의 피난처로 삼을 수 있도록 하였다(『선조실록』 28년 8월 5일). 그러나 용기성의 백성들이 용기산성으로 들어오려 하지 않는다는 보고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 용기산성의 축조 목적이 완전히 달성되지는 못하였던 것 같다(『선조실록』 29년 11월 17일).

이후 숙종대에 대규모로 산성이 신축 및 수축됨에 따라, 영남 서부 지역에서 호남으로 통하는 성주 지역을 방비하기 위해 독용산성이 신축되었다. 이로 인해 용기산성은 그 역할을 독용산성에게 내어주고 퇴락하게 되었다(『숙종실록보궐정오』 2년 1월 2일). 1757년(영조 30)에 만들어진 『여지도서』에도 폐성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현재는 가야산산성(伽倻山山城)으로 불리며 경상북도 기념물 제143호로 지정되어 있다.

형태

가야산의 정상인 칠불봉(七佛峰)의 동남쪽에 위치하며, 용기골(龍起谷)의 좌·우로 상아(嫦娥)덤과 재골산(才骨山)의 능선을 따라 축성된 포곡식 산성이다. 성벽의 둘레는 7,156㎞에 이르는 대규모급 성곽이지만 대부분의 성벽이 무너졌으며 일부 남아 있는 곳은 높이 1.5m 내외에 불과하다. 산성의 주변은 해발 1,000m 이상의 산봉우리들로 인해 산세가 험준하고 바위가 노출된 급경사지가 많으며 주변의 반상 화강암과 편마암 계통의 자연석들로 자연지형을 적절히 이용하여 성벽을 쌓았다. 북쪽에는 독용산성이 위치해 있고 동편 성곽이 위치한 능선은 동남쪽 방향으로 내려와서 낮은 봉우리들로 이어진다. 산성의 남쪽 북두산에는 외각 망루(望樓)로 추측되는 ‘북다락’이 있는데, 그 명칭으로 보아 ‘북두산’은 가야산성의 전위 초소이며 주산성(主山城)과 산 아래의 요소에 연결되는 망루의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2000년에 실시한 지표조사에 따르면 성내에 동·서·남·북의 성문을 위시하여 암문(暗門), 치성(雉城), 망루(望樓), 장대(將臺), 7개의 샘과 1개의 우물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었으며, 성안에는 용기사지(龍起寺址), 백운암지(白雲庵址), 일요암지(日曜庵址) 등의 건물지가 남아 있다.

참고문헌

  • 『만기요람(萬機要覽)』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서애집(西厓集)』
  • 차용걸, 「조선후기 산성방어체제의 운영」, 『중원문화재연구』4, 중원문화재연구원, 2010.
  • 황부연, 「조선후기 산성 수축과 운영의 재정구조」, 충북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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