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양정(華陽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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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세종이 살곶이벌에 목장을 감상하기 위해서 지은 정자.

개설

화양정(華陽亭)은 세종이 살곶이벌[箭串平]의 말목장을 감상하거나 군사적으로 중요한 말의 양육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지은 정자이다.

위치 및 용도

오늘날 서울특별시 광진구 화양동에 위치하였다. 화양정은 살곶이벌 높은 지형에 있어 목장 전체를 조망하거나 군사적으로 중요한 말의 양육 상태를 관리 감독하기 적합한 곳이었다.

변천 및 현황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화양정에 대한 기록이 등장한다. “유사눌(柳思訥)의 기문에 ‘화산(華山)의 동쪽, 한수(漢水)의 북쪽에 들이 있는데, 토지가 편평하고 넓으며 길이와 넓이가 10여 리나 된다. 뭇 산이 둘러싸고 내와 못이 둘렀다. 태조께서 한양에 도읍을 정하신 처음, 이곳을 목장으로 삼았다. 임자년에 주상천하께서 사복제조판중추부사최윤덕(崔潤德)과 이조 참판정연(鄭淵) 등을 명하여 정자를 낙천정 북쪽 언덕에 짓게 하였는데 주부(主簿)조순생(趙順生)이 그 일을 주관하였다.”는 내용이다. 이로써 낙천정 북쪽 언덕에 화양정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경지략(漢京識略)』에서는 “화양정은 낙천정 북쪽 언덕에 있는데, 태조가 도읍을 서울에 정한 당시는 목장이었으나 1432년(세종 14)에 정자를 짓고 화양정이라 했다. 이는 말이 돌아가는 아름다운 이름에서 취한 것이다.”라는 내용에서 세종대에 붙인 명칭임을 알 수 있다. 정자의 앞 풀밭에 해마다 말을 방목하므로 화양(華陽)에 말이 돌아간다는 의의로 명명한 것이다. 이것은 사복시(司僕寺) 소속이었다(『영조실록』 44년 3월 23일).

세조는 단종인 노산군이 영월로 떠날 때 화양정에서 전송하였으며(『세조실록』 3년 6월 22일), 왕자와 함께 거둥하여 대열(大閱)을 행하기도 했다(『세조실록』 5년 10월 10일). 연산군 때는 동교(東郊)에서 농사를 구경하고, 전곶(箭串)에서 사냥을 하며, 화양정에서는 신하들에게 시를 지어 올리게 하였다(『연산군일기』 4년 8월 21일). 영조는 헌릉(獻陵)에서 돌아오는 길에 화양정에서 잠시 쉬었으며(『영조실록』 9년 9월 11일), 주변에 실가(室家)가 들어섰고 농사를 짓고 있어 가옥을 철거한 후 관리하라고 명했다(『영조실록』 10년 6월 9일).

1911년에 낙뢰로 건물은 무너지고 현재는 약 700여 년 된 수령의 느티나무 몇 그루만 남아 있다.

형태

1678년(숙종 4)에 허목(許穆)이 그린 보물 1595호인 「진헌마정색도(進獻馬正色圖)」를 보면 말을 볼 수 있는 언덕 위에 정면 2칸, 측면 1칸, 팔작지붕 정자인 화양정이 등장한다.

관련사건 및 일화

일명 회행정(回行亭)이라고도 불리는데 이는 단종과 명성황후(明成皇后)와 관련된 설화와 관련이 있다. 단종이 영월로 유배 갈 때 세조는 내시들에게 화양정에서 노산군을 전송하도록 하였는데, 이때 사람들이 다시 돌아오기를 비는 의미로 불렀다. 한편 명성황후도 임오군란 때 창덕궁을 빠져나와 화양정에서 잠시 쉬었다가 돌아갔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참고문헌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한경지략(漢京識略)』
  • 서울특별시 시사편찬위원회, 『서울의 누정』, 서울특별시 시사편찬위원회, 2012.
  • 임의제, 「조선시대 서울 누정의 조영특성에 관한 연구」, 서울시립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93.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