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무재(觀武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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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왕의 특별한 명령이 있을 때 시행한 무과 시험의 한 가지.

개설

관무재는 위로는 고위 무관부터 병졸까지 모두에게 시행되었던 군사종합훈련이자 무예 권장을 위한 포상시취제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아울러 조선시대의 과거제와 군사제도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독특한 구조의 시험제도였다. 특히 관무재는 조선의 국방 및 군사 운영 체제를 파악하는 중요한 기준으로 평가되었다.

연원 및 변천

조선전기에 도성에서 다른 지역까지 이동하면서 군사훈련을 시행하였던 강무(講武)를 제외하면 중앙에서 시행하는 가장 큰 규모의 군사훈련은 대열(大閱)이었다. 대열은 왕의 참석 아래 군사들을 모아 시행하였던 대규모 군사훈련이었다. 대열이 끝나면 반드시 군사들의 무예 실력을 평가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관무재의 기원이 되었다. 관무재의 형식은 건국 초기부터 왕궁 수비와 왕의 호위 등을 담당한 금군(禁軍)이나 시위군들의 활쏘기 등을 왕이 직접 관람하던 것에서 비롯되었다. 이 당시까지는 관사(觀射)·관무(觀武)·시사(試射) 등의 표현이 사용되었다.

관사의 성적을 통하여 처음으로 관직에 대한 포상이 이루어진 것은 연산군의 재위 기간이었다. 연산군은 관사에서 우수한 성적을 낸 관리들의 품계를 올려 주는 등 포상 조치를 취하였다(『연산군일기』 10년 8월 29일). 성종대에도 관사를 통하여 포상 조치를 한 기록들이 보이지만 단순히 물건을 하사하는 정도에 그쳤을 뿐이었다.

관무재라는 용어가 『조선왕조실록』에 처음 나타나는 것은 중종대였다. 특히 명 사신이 함께 참석해서 구경하였다는 기록을 통하여 당시의 관무재는 관람용 국가 행사였음을 보여 주었다(『중종실록』 3년 5월 5일). 이후 본격화된 관무재는 수군과 육군의 열무와 조련 후 이들의 무재를 시험 보는 제도로 자리 잡게 되었다.

명종대부터는 관무재가 초시와 복시 형태로 운영되기 시작하면서 제도가 더욱 체계화되었다. 관무재는 이후에도 무과 시험의 한 종류로 계속 기능하였다. 1783년(정조 7) 이후에는 문신에 대한 시험과 유생에 대한 시험을 교대로 실시하는 것이 상례가 되었다.

절차 및 내용

관무재는 초시와 복시가 있었다. 초시는 시험 장소를 2곳으로 나누었고, 두 장소에 2품 이상의 문관과 무관 1명이 시험관으로 임명되었다. 과거 응시자들은 본전(本箭)·철전(鐵箭)·편전(片箭)·기사(騎射)·기창(騎槍)·격구(擊毬)·유엽전(柳葉箭)·관혁(貫革)·조총(鳥銃)·편추(鞭芻) 등의 무예 중에서 4기(技)를 선택할 수 있었다. 이 중 1·2기를 시험하였다.

이때 금군(禁軍)은 병조 판서가 시험관이 되어 앞서 택한 4기와 편추·기창을 추가한 6기 중에서 선택하여 시험하였다. 또한 각 군문의 군병은 각각 그 영에서 조총 및 응시자가 택한 1기를 시험하였다.

복시의 경우 서울에서는 춘당대에서 왕의 참석 아래 시험이 진행되었다. 이때 2품 이상의 문관 1명과 무관 2명이 참시관이 되어 4기를 시험하였다. 그 밖의 지방에서는 의정부 관원 1인이(1명이) 시험관이 되어 조총과 편추를 시험하였다. 그 결과 성적 우수자가 벼슬이 없는 한량(閑良)일 경우 왕이 주관하는 과거인 전시(殿試)에 직부(直赴)시켰으며, 출신(出身)인 경우에는 수령이나 변장에 임명하였다. 군관(軍官)일 경우에는 품계를 높여 주거나 포상을 시행하였다.

관무재라는 용어는 중종대부터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관무재의 성적에 따라 관리들의 승진에 영향을 주기 시작하였던 것은 연산군대부터였다. 중종대의 기록이지만 윤순(尹珣)이 관무재의 성적에 따라 당상관이 되었다는 내용이 보이기 때문이다(『중종실록』 9년 4월 9일).

숙종대에 이르러서는 왕이 춘당대에서 문사(文士)와 무사(武士)에게 시험을 치게 한 뒤 시위장사(侍衞將士)들에게 활쏘기 시험을 치르게 하자 홍문관 등에서 관무재와 다름없는 일을 시행하면서 과거의 격을 갖추지 못하였다고 지적을 했던 기록이 보이기도 하였다(『숙종실록』 7년 9월 10일). 비록 숙종의 뜻에 따라 행사가 시행되었지만 이 시기에는 관무재가 하나의 체계화된 시험제도로서 관료들에게 인식되고 있었다.

참고문헌

  • 『과거등록(科擧謄錄)』
  • 『속대전(續大典)』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이성무, 『한국의 과거제도』, 한국일보사, 1976.
  • 곽낙현, 「조선후기 『萬機要覽』을 통해 본 短兵武藝 연구」, 『동양고전연구』 43, 동양고전학회, 2011.
  • 심승구, 「조선전기의 觀武才 연구」, 『鄕土서울』 65, 서울특별시, 2005.
  • 조좌호, 「학제와 과거제」, 『한국사』 10, 국사편찬위원회, 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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