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룡제(畫龍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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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용 그림을 그려놓고 비가 내리기를 기원하던 기우 의례.

개설

화룡제(畵龍祭)는 토룡제(土龍祭)와 함께 행하던 기우제의 하나이다. 『조선왕조실록』에는 1449년(세종 31) 6월 5일 예조에서 5방토룡제(五方土龍際)와 화룡제를 행할 것을 청하자 왕이 이를 따랐다는 기록이 있다. 1474년(성종 5) 윤6월 10일에 예조에서 각처의 기우 행사 요건을 갖추어 실행할 것을 청하였는데, 그 중 화룡제는 저자도(楮子島)에서 시행한다고 하였다. 화룡기우제(畫龍祈雨祭)라고도 하였다.

연원 및 변천

1416년(태종 16) 5월 23일 예조에서 소사(小祀) 의식과 화룡제의 규식을 참고하여 제사 절차를 상정하였다고 한 것을 보면, 이에 대한 규식이 이미 마련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태종실록』 16년 5월 23일). 1469년(예종 1) 7월 12일에 화룡제를 행하였고, 또 동남(童男) 100명을 경회루 연못의 남쪽에 모아 석척기우(蜥蜴祈雨)를 행하였다. 행호군한치의(韓致義)와 언양군(彦陽君)김관(金瓘)을 행향사로 삼아 3주야 동안 제를 올렸다고 하였다. 또한 1595년(선조 28) 4월 27일 기사를 보면 저자도에서 화룡제를 지내려는데, 전에는 도류(道流)들에게 「용왕경(龍王經)」을 외우게 하였으므로 도류를 불러 물어 보니 「용왕경」이 모두 산실(散失)되어 구할 수 없다고 하였다.

동자 100명을 동원한 것이나 「용왕경」을 외우게 한 것 등을 보면 조선전기의 화룡제가 도교적인 성격을 지녔음을 알 수 있고, 더불어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이러한 전통이 지속되지 못하고 변해 갔음을 알 수 있다.

1798년(정조 22) 5월 22일에 가뭄이 심하자 왕이 날짜를 가릴 것도 없이 바로 다음날 향(香)을 받아서 용산(龍山)에는 중신을 보내고, 저자도에는 재신(宰臣)을 보내어 기우제를 설행(設行)하도록 명하였는데, 이때 하루 앞서 헌관에게 태상시에 재숙(齋宿)하면서 구임랑(久任郞)과 함께 용 그림을 살펴서 정결하게 하도록 힘쓰라고 한 것을 보면, 용 그림을 쓴 것 외에는 대개 도교식이 배제되고 대신 유교식 절차로 진행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절차 및 내용

제사 하루 전에 헌관은 태상시에 재숙하면서 구임랑과 함께 용 그림을 살펴서 정결하게 하도록 힘쓴다. 행사는 용 그림을 그려서 했으나 영조 때는 신위(神位)를 지방문(紙榜文)을 써서 만들도록 하였다. 다음날 아침 헌관은 향실(香室)에 가서 향을 받은 다음 다시 태상시로 가서 용 그림을 모시고 나갔다가 제사가 끝난 뒤에는 다시 봉안한다. 영조 이전에는 화룡제가 끝나면 용을 그렸던 종이에 제물을 싸서 강 중류에 빠뜨렸다고 한다.

생활·민속적 관련 사항

양진당은 화룡제, 즉 용의 그림을 걸고 기우제를 지내던 곳으로 유명하였다. 비를 내리게 하기 위해 물의 신인 용신(龍神)이 산다는 한강에 범 대가리를 넣는 것은 양으로 음을 달래어 기를 누르려는 음양엽승[陰陽厭勝]의 한 술법인 것이다. 기우제 때 도사(道士)들에게 용왕경(龍王經)을 읽게 한 것이나 양진당이 위치한 용당산(龍堂山)이란 산 이름도 이와 같은 양진당 기우제의 내력을 전하는 데 일조하고 있다.

지붕에 차양을 단 2칸의 양진당 내부에는 정면에 단이 있고 그 위에 ‘양진지신(楊津之神)’이라고 쓴 위패를 올려놓았다. 제사는 소재관(所在官)인 양주목사가 주관하였다. 그러나 조선중기 이후 번성한 성리학의 기세로 국가 제례에서 도교와 불교, 그리고 무속이 뒷전으로 밀리면서 양진당에 대한 관리도 소홀해져 당 안에 먼지가 쌓이고 기구가 파손되어도 바로 수리되지 않고 방치되었다.

양진당은 국가 의례 장소로서는 쇠퇴하였으나 조선후기에 이르면 그 동안 융성해진 상업 활동을 반영하듯 광나루를 이용하는 뱃꾼들과 상인들에게는 더욱 가까워져 매년 2월과 8월에 용신제가 행해질 정도로 민간 신앙의 중심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