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변일기(事變日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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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에 승정원 소속의 사변가주서가 작성한 일기.

개설

『사변일기』는 승정원 소속의 사변가주서(事變假注書)가 작성하는 일기이다. ‘사변주서일기(事變注書日記)’라고도 하였다. 일종의 업무 일지와 같은 성격으로, 사변가주서가 담당하던 업무와 관련된 기록이다. 따라서 『사변일기』에는 칙사(勅使)의 영접이나 국청(鞫廳) 개설 후의 죄인 심문 기록, 지방관의 장계 등이 수록되었다.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소장되어 있다.

편찬/발간 경위

『사변일기』는 사변가주서의 설치와 함께 기록된 것으로 추정된다. 승정원의 직제에는 당초에 정7품의 주서 2명이 설치되어 있었으나, 선조대에 사변가주서라는 이름으로 1명의 가주서가 차출되었다. 이후 칙사의 접대를 비롯해 국청(鞫廳)추국(推鞫) 때 기록의 담당을 위해 임시로 가주서가 다양한 이름으로 차출되었다. 이때 사변가주서가 업무를 병행하는 경우에는 ‘사변가주서겸접대수정가주서(事變假注書兼接待修正假注書)’와 같은 직명으로 불렀다.

『사변일기』는 사변가주서가 작성한 일기로(『선조실록』 32년 11월 1일), 임진왜란 중에 전시 상황을 기록하면서 시작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사변일기』는 추국 때의 기록이나, 변방의 정세 등을 기록하였다.

서지 사항

『사변일기』는 승정원에서 편집하였으며, 필사본이다.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같은 이름의 책이 소장되어 있다. 장서각에 소장된 『사변일기』는 1723년(경종 3)부터 1848년(헌종 14)까지를 기록하고 있는데, 같은 이름의 일기를 일제시대에 이왕직(李王職)에서 전사(傳寫)한 것이다. 도서에 따라 71책, 5책 등 책 수에서 차이가 있다.

구성/내용

『사변일기』는 임진왜란과 같은 전쟁이 있을 때는 전시 상황을 기록하였고, 지방관들이 변방의 상황을 진술하여 보고한 장계(狀啓)를 기록하기도 하였다(『정조실록』 5년 4월 5일). 추국이 있으면 추국 과정에서 진술된 죄인의 문초 내용을 수록하였다. 이로 인해 『사변일기』가 국안(鞫案)이라고 인식되기도 하였다(『영조실록』 10년 6월 13일). 『사변일기』에는 죄인의 문초와 관련해서는 죄인에게 질문할 항목인 문목(問目)이 기재되어 있어 각종 옥사에 대한 사실 확인이 필요할 때는 전거 자료로 활용되었다. 예를 들어, 1773년(영조 49) 5월 조동하(趙東夏)를 죄적(罪籍)에서 신원시키는 과정에서 사실 확인을 위해 『사변일기』가 이용되었다(『영조실록』 49년 5월 7일).

한편 1599년(선조 32) 11월부터는 『사변일기』에 담당 승지와 주서의 이름을 기록하게 하였다. 이는 『사변일기』의 부실함을 방지하기 위해 우부승지송순(宋諄)의 건의에 따른 것이었다. 당시 송순은 자신이 『사변일기』 몇 권을 검토한 결과 기록이 소루(疏漏)하여 1개월에 7일이나 8일 정도의 기록밖에 확인되지 않고, 하루의 분량도 겨우 6~7항(行)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또한 일자가 섞여 있거나 내용을 마무리하지 않고 빈 종이만 채운 경우도 있으며, 동일한 기사를 반복하는 등 많은 문제점이 있었다고 하였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가주서에 대한 통제를 강조하는 한편 승지나 주서의 명단을 기록하게 할 것을 청한 것이 반영된 것이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영종대왕실록청의궤(英宗大王實錄廳儀軌)』
  • 강성득, 「17~18세기 승정원 주서직의 인사 실태」, 『한국학논총』31, 2009.
  •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 국사편찬위원회, http://www.koreanhistory.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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