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과군기(조선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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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지방에서 매달 의무적으로 바치던 군수품.

개설

조선초기에는 지방에서 매달 정해진 양의 군기(軍器)를 제조하고, 그 수량을 회계하여 중앙정부에 보고하는 월과군기제가 시행되었다. 매달 부과된다는 뜻에서 월과라고 하였다. 국가가 필요한 관군기(官軍器)를 조달하는 방법은 2가지였다. 첫째는 중앙의 군기감에서 서울의 공장[京工匠]들을 사역하여 군기를 제조·조달하는 방법이고, 둘째는 도 단위로 군기를 제조하게 하여 진상하게 하는 방식이었다. 군기에 관련된 진상은 명일(名日)에 바치는 명일진상과 매달 제조하여 바치는 월과진상이 있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조선왕조가 성립된 후 중앙에서는 군기감을 설치하여 군기 제조 방식을 정비하였다. 그러나 지방은 고려말 이래 군기 제조 체제가 그대로 지속되었다. 철물의 제련양은 늘어났으나, 군기 제조량은 증가되지 않는 등 많은 문제점이 드러났다. 이러한 문제를 개선하기 위하여 모색된 것이 월과군기제였다. 정부는 1392년(태조 1) 군기 수요가 큰 서북면을 대상으로 도순문사의 책임 아래 월과제로 군기를 제조하도록 하였다. 전국적으로 시행되지 못한 월과군기제가 본격적으로 제도화된 것은 1397년(태조 6)이었다. 도에 군사 단위로서 진이 설치되면서 월과군기제는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내용

영(營), 진(鎭)에는 소속되어 군기를 전문으로 제조하는 장인이 있었다. 이들은 보통 ‘월과장인’으로 불리며, 특히 영에 속한 월과장인의 경우 ‘속영장인’이라 불렀다. 장인에는 갑장(甲匠)·야장(冶匠)·궁인(弓人)·시인(矢人)·궁현(弓弦)장·목장·피장·칠장·유장(鍮匠)·마조(磨造)장 등이 있었다. 이들은 활·화살·창·검·환도(還刀)·철갑·지갑(紙甲) 그리고 가슴을 가리는 갑옷인 엄심(掩心) 등 군기를 매월 정해진 액수대로 제조하였다.

군기감에서는 군기의 견본을 제작하여 지방에 보내, 이에 따라 치밀하게 제조하도록 하였다. 1451년(단종 1)에는, 경기는 ‘기(畿)’, 나머지 도는 첫 자를 교서감에서 전자(篆字)로 쓰고, 공조에서 주인(鑄印)하여 각 도에 보내, 관찰사영에 보관하다가 제작된 군기에 찍도록 하였다. 도장을 찍기 어려운 칼과 철갑옷은 대신 글자를 새기도록 하였다.

변천

임진왜란으로 조선의 무기 생산 체제에 많은 변화가 생겼다. 유명무실했던 군기시(軍器寺)는 왜란 중 본래의 업무를 되찾고, 속오군(束伍軍)의 무기 조달도 관장하게 되었다. 군기시는 각종 원료를 공납 형태로 수취하여 무기를 제조하였고, 이를 각 읍에 나누어 주었다.

1603년(선조 36)에는 각 읍이 사용할 염초를 자체 생산하도록 하는 ‘각읍월과자초(煮硝)법’이 제정되었다. 이 법에 규정된 각 읍의 월 생산액은 대읍 40근, 중읍 30근, 소읍 15근이었다. 이 월과법은 각 진의 화살 생산에도 적용되었다. 이것이 ‘각진월과궁전(弓箭)법’이다. 광해군 때에는 조총·화살·연환(鉛丸)을 각 읍에서 자체 조달하도록 하는 ‘각읍월과군기법’이 제정되었다. 정부는 각 읍에 총약환(銃藥丸)의 월별 생산액을 배정하고, 총약환의 법정가도 정하였다. 조총은 1자루에 쌀 3석 5두, 화약은 1근에 10두, 연환은 100개에 5두였다.

각읍월과군기법의 목적은 각 읍에서 의무적으로 군기를 자체 생산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염초를 제외한 유황·연철 등을 각 읍이 직접 생산하기 힘들었기 때문에 이를 구입해 충당할 수밖에 없었다. 각읍월과군기법의 시행은 철·유황·아연 등을 생산할 수 있는 광산 개발을 촉진하였고, 총약환의 상품화를 진전시켰다.

월과 조총·화약·연환은 상당한 이윤이 보장되는 상품이고, 전국 각 읍을 상대로 판로가 넓은 물종이었다. 서울의 부민(富民)들은 점차 총약환의 무기 제조장을 개설하여 운영하게 되었다. 그에 따라, 우수한 공장(工匠)들이 서울로 모여들었다. 무기 제조업이 성장하면서 지방에도 무기 제조에 필요한 원료를 생산·판매하는 수공업이 발달하고, 이를 매매하는 상인도 등장했다. 각 읍 수령들은 서울의 부민이 생산한 총약환을 구입하여 월과군기에 충당하였다. 월과군기가가 대동미에 포함되지 않았지만, 수령들이 민결(民結)에서 염출하였고, 민간 제조업자들이 월과군기가를 받고 정기적으로 총약환을 제조 납품하는 등 사실상 공물의 방납 형태가 형성되었다.

1652년(효종 3)에 충청도에 대동법이 실시되면서, 각 읍의 월과군기가를 대동미에 포함시키는 ‘각읍월과총약환법’이 제정되었다. 이 법은 그 후 전라도·경상도에 확대 적용되어, 전결 수에 따라 대·중·중소·소·잔읍에 월과총약환을 제조하는 데 드는 월과미가 차등 있게 배정되었다.

삼남 각 읍의 월과미를 1654년(효종 5)에 충청도, 1663년(현종 4)에 전라도, 1681년(숙종 7)에 경상도 대동미에 각각 포함시키면서 조총·화약·연환이 새로운 공물 물종으로 확정되었다. 경기도는 1624년(인조 2)에 총융청, 1626년(인조 4)에 수어청을 설치하면서 각읍월과군기법을 혁파하고, 총약환을 소속 군문에서 제조하게 하였다. 평안도와 함경도는 각읍월과군기법이 그대로 적용되었고, 황해도와 강원도는 1708년(숙종 34)에 적은 액수이지만 월과미가 상정가(詳定價)에 포함되었다.

1686년(숙종 12)부터는 삼남의 각읍월과총약환을 훈련도감·어영청·금위영의 세 군문에 균분하여 방납하도록 결정하였다. 이는 서울의 민간 제조업자가 방납해 왔던 전국 각 읍의 월과군기 중, 삼남의 각읍월과총약환 방납권을 세 군문에서 흡수한 것이었다. 또한 대동법이 적용되지 않는 각 도의 감영에서도 월과군기가와 생산가 사이의 차액을 얻기 위하여 관내 각 읍의 월과군기를 방납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반발한 민간 제조업자는 상진청(常賑廳)이나 군기시와 결탁하여 군문과 다투면서 총약환의 공인제(貢人制)를 성립시켜 나가기 시작하였다. 상진청과 결탁한 민간 제조업자는 1685년(숙종 11)에 삼남월과연환계(鉛丸契)를 창설하고, 1704년(숙종 30)에는 삼남월과화약계, 1710년(숙종 37)에는 해서월과총약환계를 성립시켰다. 이 3계는 1754년(영조 30)에 총융청에서 관장하게 되었다.

군기시와 결탁한 민간 제조업자는 1703년(숙종 29)부터 삼남월과조총과 화약 일부를 돈을 받고 만들어 납부하였고, 1708년(숙종 34)에는 강원도의 월과총납환을 공납하였다. 1725년(영조 1)부터는 평안도와 황해도, 1737년(영조 13)에는 삼남의 천보총(千步銃)을 돈을 받고 만들어 납부하였다.

참고문헌

  • 이정철, 『대동법』, 역사비평사, 2010.
  • 김일환, 「조선초기 월과군기제하의 군기제조」, 『조선시대사학보』 16, 조선시대사학회, 2001.
  • 유승주, 「조선후기 貢人에 관한 일연구(상)(중)(하)-三南月課火藥契人의 受價製納실태를 중심으로-」, 『역사학보』 71·78·79, 1976, 1978.
  • 유승주, 「조선후기의 월과총약환계 연구」, 『한국사론』 9 , 국사편찬위원회, 1991.
  • 유승주, 「군수공업의 성장과 군수광업의 발전」, 『한국사』 30, 국사편찬위원회,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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