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목(李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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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72년(선조 5)∼1646년(인조 24) = 75세]. 조선 중기 선조~인조 때의 문신. 행직(行職)은 도승지(都承旨)·이조 참판(吏曹參判)·대사헌(大司憲)·대사간(大司諫)이고, 봉작(封爵)은 호종 공신(扈從功臣)이며, 증직(贈職)은 영의정(領議政)이다. 자(字)는 문백(文伯)이고, 호(號)는 송휴(松畦)·송교(松郊)이다.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사옹원(司饔院) 봉사(奉事)이신성(李愼誠)이고, 어머니 원주변씨(原州邊氏)는 부사과(副司果)변극성(邊克誠)의 딸이다. 효령대군(孝寧大君)의 7대손이고, 홍문관 부제학(副提學)이지항(李之恒)의 아버지다. 우계(牛溪)성혼(成渾)과 사계(沙溪)김장생(金長生)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는데, 김장생의 아들 신독재(愼獨齋)김집(金集)과 절친한 사이였다. 그의 문하에서 부익자(孚翼子)정양(鄭瀁: 정철의 손자)·백원(百源)신석번(申碩蕃)·동이(同異)이척연(李惕然) 등이 배출되었다.

서인(西人)의 청서파(淸西派)에 속했던 이목은 공서파(功西派)의 영수 이귀(李貴)를 공격하다가,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겼다. <병자호란(丙子胡亂)>당시 주화파(主和派)와 척화파(斥和派)가 논쟁할 때, 대사헌이목은 대사간윤황(尹煌)과 함께 대간(臺諫)을 이끌며 주화파 최명길(崔鳴吉)·김류(金瑬) 등을 맹렬히 공격하였다. 예학(禮學)에 정통한 그는 소현세자(昭顯世子)와 원손(元孫: 소현세자 맏아들)의 보양관(輔養官)이 되었는데, 소현세자가 비명에 죽자, 세자의 3년 상을 주장하였고, 인조가 둘째왕자 봉림대군(鳳林大君: 효종)을 세자(世子)로 책봉하자, 원손(元孫)을 세손(世孫)으로 삼는 것이 정도(正道)라고 주장하며 혼자 반대하다가 관직에서 물러났는데, <강빈(姜嬪: 소현세자빈 강씨) 옥사> 때 충격을 받고 곧 바로 세상을 떠났다.

선조~광해군 시대 활동

1603년(선조 36) 사마시(司馬試) 생원과(生員科)로 합격하였는데, 나이가 32세였다.[『국조방목(國朝榜目)』] 성균관에 입학하여 공부하였는데, 그의 스승인 우계(牛溪)성혼(成渾)이 <기축옥사(己丑獄事)>의 배후로 지목되어, 죽은 뒤에 삭탈관직(削奪官職)되자, 1608년(광해군 즉위년) 4월, 성균관의 유생들을 이끌고 우계성혼의 원통함을 풀어달라는 상소를 하였다. 대북(大北)의 영수 정인홍(鄭仁弘)이 퇴계(退溪)이황(李滉)과 회재(晦齋)이언적(李彦迪)을 비난하며, 문묘(文廟)에서 이들을 몰아내고 그의 스승인 남명(南冥)조식(曺植)을 모시려고 하자, 이목은 1611년(광해군 3) 4월, 성균관의 여러 유생들을 모아놓고 정인홍의 죄를 성토할 것을 발의한 후, 5백여 명의 유생들 가운데 소두(疏頭)가 되어, 그를 탄핵하는 상소를 올리는 한편, 청금록(靑衿錄: 유생 명단)에서 정인홍의 이름을 삭제하고, 8도(道)의 유림에 그 죄를 밝히는 통문을 보냈다. 이때부터 그는 사림(士林)에서 유명한 인물이 되었다.[비문]

1612년(광해군 4) 식년(式年) 문과에 갑과(甲科) 3등 탐화랑(探花郞)으로 급제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41세였다.[『국조방목(國朝榜目)』] 바로 사재감(司宰監) 직장(直長)에 보임되었다가, 1613년(광해군 5) 6품의 검교(檢校)로 승진되었다. 1615년(광해군 7) 2월, 병조 좌랑(兵曹佐郞)에 임명되었으나, 정인홍의 사주를 받은 사헌부에서 그가 중임을 맡기에 적합하지 못하다고 탄핵하면서 파직되었는데, 그 이유는 이목이 성균관의 유생으로 있을 때 소두(疏頭)가 되어, 정인홍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기 때문이었다. 1616년(광해군 8) 대북(大北)의 정인홍·이이첨(李爾瞻) 등이 문무백관들로 하여금 궁정의 뜰에 나아가 광해군에게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위시키는 상소를 올리는 ‘정청(庭請)’을 하도록 하였는데, 만약 정청(庭請)에 참여하지 못하는 사람은 각자 자기 생각을 글로 써서 ‘헌의(獻議)’하도록 하였다. 이때 이목은 “인륜이 무너졌는데, 살아서 무엇 하겠는가.” 하고 탄식하며, 폐위에 반대하는 글을 써서 헌의하였다. 1620년(광해군 12) 10월, 광해군은 왜란 때 불타버린 궁궐을 새로 짓는데 필요한 목재를 구하기 위하여, 이목을 강원도 경차관(敬差官)으로 파견하였는데, 그는 전세(田稅)와 공물(貢物)을 목재로 환산해서 받아 서울로 수송하였다.(『광해군일기』 12년 6월 13일) 1622년(광해군 14) 다시 병조 좌랑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행장]

인조 전반기 활동

1623년 3월 12일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났을 때, 이목은 경상도에 있었으므로, 반정에 참여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인조는 즉위하자마자, 그를 사간원 정언(正言)에 임명하였다. 곧 이어 사간원 헌납(獻納)으로 승진하였고, 지제교(知製敎)를 겸임하였다. 그해 5월, 강화도(江華島)에 유폐된 광해군의 세자(世子) 이지(李祬)가 70여 척이나 되는 땅굴을 파고 밤중에 황해도로 탈출하려다가 나졸에게 붙잡혔다. 세자 이지의 처리 방안을 두고 반정에 참여한 공서파(功西派) 이귀(李貴)·김류(金瑬) 등은 그를 법에 따라 처형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반정에 참여하지 않은 청서파(淸西派) 헌납이목(李楘), 정언신천익(愼天翊) 등은 세자 이지에게 은혜를 베풀어 죽이지 말자는 <전은론(全恩論)>을 주장하였는데, 결국 공서파에 의하여 모두 파직되었다.(『인조실록』 1년 5월 27일) 그해 6월, 성균관 직강(直講)이 되었고, 그해 7월, 홍문관에 들어가 부수찬(副修撰)·교리(校理)로 승진하였는데, 춘추관의 사관(史官)을 겸임하였다. 그해 8월, 이조 좌랑(吏曹左郞)이 되어, 인사를 공평하게 시행하였다. 그해 11월, 암행어사(暗行御書)에 임명되어 강원도 지방을 염찰하였는데, 두메산골까지 찾아가 살피지 않은 곳이 없었다.[행장]

1624년(인조 2) 1월, 이조 정랑(吏曹正郞)으로 승진하였는데,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났다. 이목은 어가(御駕)를 호종하여 공주(公州)에 이르러 홍문관 부교리(副校理)에 임명되었다. 반란 초기에 어영사(御營使)이귀(李貴)가 임진강에서 반군을 막다가, 패주하는 바람에 관군이 연달아 무너졌다. 이때 양사(兩司)에서는 이귀의 권세를 무서워하여, 그의 부장(副將)들만 논죄하였으나, 홍문관 부교리이목은 응교윤황(尹煌: 윤증의 조부)과 함께 어영사이귀의 죄를 물어 효시(梟示)해야 한다는 차자(箚子)를 올렸다.[비문] 당시 인조는 공서파 이귀·김류 등에게 의존하는 상황이었으므로,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해 3월, 이귀가 스스로 자기 변명을 하며 관직을 사임하자, 인조는 부교리이목과 응교윤황을 파직시켰다. 그해 4월, 성균관의 전적(典籍)·직강(直講)을 거쳐서, 그해 5월, 다시 홍문관 부교리에 임명되었다. 그해 6월, 다시 이조 정랑이 되었다가, 그해 8월, 홍문관 교리(校理)가 되어, 훈련도감 낭청(郎廳)을 겸임하였는데, 백성들의 부역(賦役)을 줄이려고 노력하였다. 그해 10월, 의정부의 검상(檢詳)·사인(舍人)을 역임하였다.(『인조실록』 2년 10월 11일)

1625년(인조 3) 1월, 사헌부 집의(執義)가 되어, 세자시강원 보덕(輔德)을 겸임하였다. 이때 인조는 소현세자(昭顯世子)를 책봉하고 궁료(宮僚)를 엄격히 선발하였는데, 이목과 이식(李植)을 보덕으로, 정백창(鄭百昌)을 필선(弼善)으로, 강석기(姜碩期)를 사서(司書)로 임명하였다. 이식의 처는 인조의 이모의 딸이고, 정백창의 처는 중전(中殿)의 언니이며, 강석기는 소현세자의 장인이었다. 이목은 곧 홍문관 응교(應敎)로 전임되었으나, 그가 예절을 잘 안다고 하여, 소현세자가 관례(冠禮)를 행할 때, 찬례(贊禮)로 뽑혀 관례를 주관하였다. 이목은 이때 소현세자와 관계를 맺게 되었는데, 20년 뒤에 소현세자가 죽고 인조가 봉림대군(鳳林大君: 효종)을 세자로 삼으려고 하자, 이목만이 홀로 유교의 적장자(嫡長子) 상속 원칙에 따라 소현세자의 맏아들을 후계자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관례를 주관한 포상으로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품(陞品)되었고, 그해 2월, 승정원 동부승지(同副承旨)에 발탁되었다.(『인조실록』 3년 2월 29일) 그 후 우부승지·좌부승지를 거쳐 우승지가 되었다가, 그해 9월에 예조 참의로 전임되었다.(『인조실록』 3년 9월 4일)

1626년(인조 4) 3월, 이조 참의(吏曹參議)가 되었는데, 이조에서 관리하는 내수사(內需司)에 공문을 보내 송사(訟事)에 연관된 일체의 문서에 서명해주지 않겠다고 통고하였다. 내수사는 궁중에서 쓰는 쌀·베·잡물을 취급하는 기관으로 당시 시장 상인들이 환관이나 궁녀들과 손을 잡고 온갖 비리를 저질렀기 때문이었다. 이때 인조는 이조 참의이목을 불러서 “근래 내수사의 일이 이조 때문에 막혀서 지체된다고 하니, 정말로 이 처럼 해서는 안 된다.”며 타일렀다. 이에 이목은 “내수사의 작폐(作弊)가 이미 고질병이 되었고, 이른바 관원이라는 자들은 모두 환관과 시정잡배들인데, 오직 이익만을 탐내어, 말을 꾸며서 위에 아뢰고 관사를 협박합니다. 내수사를 혁파하여 성상께서 사심(私心)이 없다는 것을 보여 주소서.” 라고 하였으나, 인조는 시행되어 온 지 이미 오래되었으므로, 갑자기 개혁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해 8월, 병조 참의(兵曹參議)로 전임되었다. 그해 9월, 대사간(大司諫)에 임명되었으며, 얼마 후 우승지(右承旨)를 거쳐서 예조 참의(禮曹參議)를 역임하였다.[행장]

1627년(인조 5) 1월, 이목은 대사간(大司諫)에, 윤황(尹煌)은 사간(司諫)에 임명되었다. 이때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났는데, 후금(後金)의 아민(阿敏)이 오랑캐 기병(旗兵) 3만여 명을 거느리고 침입하자, 인조는 서둘러 강화도로 피난하였다. 대사간이목과 사간윤황은 인조에게 강화도로 피난하지 말고, 파주(坡州)로 나가 직접 오랑캐 군사를 맞아 싸울 것을 권유하는 한편, 서울 도성을 버리고 강화도로 피난 가자고 제안한 재상을 참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비문] 그러나 후금의 아민이 사신 유해(劉海)를 강화도에 보내어 화의(和議)를 청하자, 공서파 최명길(崔鳴吉)과 이귀(李貴) 등은 화의를 받아들여, 강화 조약을 맺었고 후금의 군사는 철수하였다. 강화 조건은 양국이 ‘형제(兄弟)의 의(義)’를 맺고, 해마다 세폐(歲幣)를 보내기로 하였던 것이다. 이에 대해 대사간이목과 사간윤황은 “일찍이 최명길이 서울 도성을 떠날 것을 제안하였는데, 그의 잘못된 계책 때문에 임진강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또한 이귀는 어리석고 망령되어 나라를 그르쳤으니, 비변사에 그대로 둔다면 반드시 나라의 대계(大計)를 그르칠 염려가 있으니, 귀양 보내소서.” 하고 아뢰었다. 그러나 이귀는 이목과 윤황이 “시세(時勢)를 모르면서 큰소리만 친다.”고 헐뜯었으며, 비변사의 대신들도 모두 이들 두 사람을 나무랐다. 인조가 서울 도성으로 돌아오자, 대사간이목과 사간윤황은 대간(臺諫)의 관직을 사임하였다.[행장]

1628년(인조 6) 4월, 대사간(大司諫)에 임명되었고, 그해 8월, 이조 참의(吏曹參議)에 임명되었으나 사임하였다. 1629년(인조 7) 4월, 병조 참의(兵曹參議)에 임명되었고, 그해 10월, 대사간에 임명되었으나, 한 달 뒤에 사임하였다. 1630년(인조 8) 9월, 병조 참의에 임명되었다. 1631년(인조 9) 2월, 홍문관 부제학(副提學)이 되었다가, 그해 4월, 좌승지(左承旨)에 임명되었다. 당시 인조는 생부인 정원군(定遠君)을 원종(元宗)으로 추숭(追崇)하고 그 위패를 종묘에 부묘(祔廟)하려고 하였는데, 공서파 이귀(李貴) 등을 제외한 모든 신료들이 이에 반대하였다. 이때 동료 승지들은 이목이 예학(禮學)에 정통하다고 하여, 추숭과 부묘에 관한 출납(出納)을 그에게 전적으로 맡겼다. 인조가 이목에게 “대간(臺諫)의 계사(啓辭) 가운데 <소목(昭穆)의 설>이 있었는데, 나는 학문이 얕아서 알 수 없으니, 승지가 나에게 자세히 설명하도록 하라.”고 하자, 이목은 종묘에 성종(成宗)으로부터 선조(宣祖)에 이르기까지 고조(高祖)의 신주를 중심으로 2소(昭)와 2목(穆)으로 배열한 원리를 자세히 설명하였는데, 인조는 “고금에 아버지의 위패가 없는 사당이 어디에 있는가. 또 고조(高祖)가 두 분이 있는 사당이 어디에 있는가.”라고 화를 내며, 이목에게 입시(入侍)하지 말라고 명하였다.[행장]

그해 6월, 인조는 이목을 공주 목사(公州牧使)로 좌천시켰다. 이목이 공주 목사로 부임하였을 때, 스승인 사계(沙溪)김장생(金長生)이 병석에 누워 있었으므로, 이웃 고을 연산(連山: 논산)으로 가서 문병하였다. 스승 김장생이 돌아가자, 공주 목사이목이 장사를 주관하였는데, 상주 김집(金集)과 상의하여 한 결 같이 고례(古禮)를 따라 장례를 치렀다.[행장] 이때 성균관에서 공부하던 이목의 아들 이지항(李之恒)이 소두(疏頭)가 되어 유생들을 이끌고, 추숭(追崇)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자 이귀는 인조에게 “이목이 아들을 시켜 상소를 올리게 하였는데, 이것은 성상으로 하여금 그의 아들에게 굽히게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전하께서 엄하지 않은 소치입니다.” 라며 극단적인 언사를 써서 이목을 공격하였는데, 인조도 그의 말이 옳다고 생각하였다.(『인조실록』 9년 10월 2일) 이 일로 더욱 불안해진 이목은 공주 목사를 연임한 후, 또 다시 외직을 자원하였고, 1634년(인조 12) 충청도 서천 군수(舒川郡守)가 되었다. 군수로 부임한 이목은 고을 백성들에게 조세와 부역을 경감시켜 주고, 농사와 양잠(養蠶)을 장려하는 등 선정(善政)을 베풀었다. 그가 임기를 마치고 돌아오자, 고을 백성들이 송덕비(頌德碑)를 세워 그를 추모하였다.[행장]

인조 후반기 활동

1636년(인조 14) 형조 참판(刑曹參判)으로 발탁되었다가, 대사헌(大司憲)이 되었다. 그해 12월,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났다. 청(淸)나라 태종(太宗)이 기병(旗兵) 10여 만 명을 이끌고 침략하자, 인조는 군사 1만 3천여 명을 이끌고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들어가 오랑캐 군사와 47일 간을 결사항전 했으나, 결국 청나라에 항복하였다. 남한산성에서 싸울 때 조정에서는 성중의 사대부를 인솔하여 북성(北城)의 수비를 돕도록 이명을 협수사(協守使)에 임명하였는데, 협수사이목은 칼바람과 눈을 맞으면서도 북쪽 성벽의 성가퀴를 지키며,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청나라 군대에 포위되어 있던 남한산성 안에서 주화파(主和派)의 최명길(崔鳴吉)·김류(金瑬) 등과 척화파(斥和派)의 김상헌(金尙憲)·정온(鄭蘊) 등이 격렬하게 논쟁할 때, 대사헌이목은 대사간윤황(尹煌)과 함께 대간(臺諫)을 이끌고 척화파의 김상헌·정온 등을 지지하며 척화파의 최명길·김류 등을 탄핵하였다. 그러나 남한산성에 비축했던 식량이 떨어지고, 또 강화도(江華島)가 함락되어 세자빈(世子嬪) 강씨(姜氏)와 봉림대군(鳳林大君)이 포로가 되면서, 결국 인조는 청나라 태종에게 항복하였는데, 대사헌이목은 대사간윤황과 손을 잡고 통곡하였다.

1636년(인조 14) 1월 인조는 서울 도성으로 돌아올 수 있었으나, 청나라의 항복 조건은 조선이 청나라에 대하여 ‘군신(君臣) 관계’를 맺고 앞으로 청나라의 연호(年號)를 쓰며, 해마다 막대한 세폐(歲幣)를 청나라에 바쳐야 하는 것 뿐 만 아니라,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등을 청나라에 볼모로 보내기로 하는 것이었다. 이에 소현세자 내외와 봉림대군이 청나라 심양(瀋陽)에 볼모로 가고, 척화파 강경론자인 홍익한, 윤집, 오달제가 잡혀가 참형을 당하였으며, 예조 판서김상헌 등도 청나라 심양으로 잡혀가 옥살이를 하였다. 이때 대사간윤황(尹煌)도 귀양을 갔으나, 대사헌이목은 이를 면하였는데, 이목은 자기 혼자만 죄를 면할 수 없는 생각에 두문불출하고 은거하였다. 그는 남한산성에서의 일을 떠올릴 때마다 “남한산성에서 내려올 때 죽지 않고 지금까지 벼슬하고 있으니, 너무나 부끄럽다.”며 눈물을 흘렸다.[비문] 이후 이목은 언제나 한 밤중에 일어나, 중국 송나라 충신 ‘문천상(文天祥)의 대책(對策)’과 ‘호담암(胡澹庵)의 상소문(上疏文)’를 외웠는데, 송나라가 여진족의 금(金)나라와 싸울 때 올린 충신들의 대책과 상소문이, 인조 때 여진족의 청(淸)나라와 싸웠던 자기 자신의 생각과 똑같다는 생각에 무릎을 치고 탄식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행장]

그해 5월에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에 임명되었다가, 대사간(大司諫)으로 전임되었다. 그때 이목은 모든 공사(公事)에 명나라 숭정(崇禎) 연호를 그대로 쓰고 청나라 연호를 쓰지 않았는데, 인조는 이목에게 “각 관사에서는 청나라 연호를 쓰고 있는데, 경만 혼자 연호를 다르게 써서는 안 된다.”며 엄하게 분부를 내렸다. 이에 이목은 벼슬살이 하는 것을 싫어하여 조정에서 벼슬에 임명하는 소명(召命)을 내릴 때마다 번번이 사임하는 글을 올려서 체직되었다. 이때 대간(臺諫)에서는 김자점(金自點)과 김경징(金慶徵: 김류의 아들) 등의 죄를 탄핵하였으나, 인조가 허락하지 않자, 대사간이목은 동료 대간들과 함께 “김자점은 도원수(都元帥)로서 군사를 거느리고 평안도에서 적을 방치하여 내지(內地)로 깊숙이 침입하도록 하였고, 군부(君父)가 포위되었는데도 즉시 달려와 구원하지 않았으며, 김경징은 강화도분(分) 비변사의 검찰사(檢察使)가 되어 강화도를 방어하는 데 마음을 쓰지 않다가, 적병이 임진강에 당도하자, 지레 겁을 먹고 먼저 도망치는 바람에 강화도가 적의 수중에 들어갔으며, 부 검찰사이민구(李敏求: 이성구 동생)도 한꺼번에 같이 도주하였으므로 그 죄가 동일하니, 모두 법에 따라 처벌하소서.”라며 연명으로 상소하였으나, 역시 인조가 허락하지 않았다.[행장]

그해 7월에 대사간으로서 경연(經筵)의 동지사(同知事)를 겸임하였는데, 사헌부와 합사(合司)하여 영의정김류(金瑬)와 윤방(尹昉)의 죄를 논하고, 좌의정이성구(李聖求: 이수광의 아들)를 파직할 것을 청하였다. <병자호란> 당시 영의정김류는 평안도 안주(安州)를 중심으로 하는 산성(山城) 방어 체제를 구축하였으나, 청나라 태종이 이를 미리 알고 산성을 피하여 평양·개성·서울을 차례로 점령하면서 큰 낭패를 보았기 때문이었고, 전 영의정윤방은 김상용(金尙容)과 함께 종묘사직의 신주를 받들고 먼저 강화도로 피난 가서, 분 비변사를 이끌고 강화도의 방어를 책임지도록 하였으나, 강화도가 적에게 쉽게 함락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인조는 이를 따르지 않았다. 그해 8월에 좌승지로 옮겼다가, 대사헌·형조 참판을 거쳐, 그해 9월에 다시 대사간에 임명되었다. 그해 10월에 또 대사성이 되었고, 그해 11월 우승지(右承旨)가 되었다가, 병조 참판(兵曹參判)이 되어, 의금부 동지사(同知事)를 겸임하였다. 그해 12월, 다시 대사헌이 되자 사간원과 합계하여, 김류와 윤방을 위리안치(圍籬安置)하도록 청하였다. 그러나 이목이 체차되어, 중추부(中樞府) 동지사(同知事)가 되었다.[행장]

1638년(인조 16) 대사헌이 되었다가, 홍문관 부제학(副提學)이 되었으나, 여러 번 사임하는 글을 올려 체직되었다. 그해 2월에 대사간(大司諫)이 되었다가, 도승지(都承旨)로 영전되었다. 인조는 바른 말을 하는 이목을 측근으로 두고 싶어 하였으나, 그는 임금에게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그해 6월에 대호군(大護軍)이 되었다가, 성균관 동지사(同知事)에 임명되었고, 다시 대사헌을 거쳐서 홍문관 부제학(副提學)이 되었다. 이목이 대사헌이 되었을 때, 사헌부 장령(掌令)유석(柳碩) 등이 척화파의 영수인 청음(淸陰)김상헌(金公尙憲)을 탄핵하며 심하게 무함하자, 대사헌이목은 “김상헌과 정온 두 사람이 앞장서서 충의를 분발하여 자결하려고 했던 것은 성상께서 치욕을 당하는 것을 차마 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니, 그 뜻을 가엾게 여기고 그들을 의롭게 여기소서.”라는 차자를 올렸다. 원래 대간(臺諫)에서는 발론(發論)할 때, 사헌부와 사간원의 간관(諫官)들이 모여서 의견을 조율하는 것이 관례였으나, 당시 척화파와 주화파의 논쟁이 너무 치열하여, 의견이 서로 조율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해 7월에 다시 홍문관 부제학이 되었고, 그해 12월, 병조 참판(兵曹參判)에 임명되었다가, 얼마 후 체직되었다. 이때부터 오랫동안 산반(散班)인 중추부의 첨지사(簽知事)로 있었다.[행장]

1639년(인조 17) 인조가 특별히 이목을 함경도 종성 부사(鍾城府使)에 임명하였는데, 사간원에서 이를 반대하였다. 인조는 “이목이 고을을 잘 다스리니, 북방의 백성으로 하여금 그 혜택을 입게 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으나, 의정부에서 연달아 차자를 올리자, 종성부사 임명을 취소하였다. 그 이듬해 1640년(인조 18) 2월, 인조는 특별히 이목을 여주 목사(驪州牧使)에 임명하였다. 그러나 그가 청나라 사신이 올 때 한 번도 교외(郊外)에서 영접하는 반열에 참여한 적이 없었다는 이유로 얼마 되지 않아 강원도 감사(監司)로 전임되었다. 1641년(인조 19) 10월, 강원도 감사의 임기가 만료되면서, 서울로 돌아와 중추부 동지사(同知事)가 되었는데, 의금부 동지사를 겸임하였다. 그해 11월,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에 임명되었다.

1643년(인조 21) 3월, 대사헌으로 전임되었다. 이때 병조 참의민응형(閔應亨)이 입대(入對)하여 우의정심기원(沈器遠)의 방자한 행태를 탄핵하는 한편, 평소에 직언(直言)을 잘한다고 소문이 난 대사헌이목까지 입을 다물고 침묵하고 있다며 비난하였다. 대사헌이목이 인피(引避)하자, 우의정심기원이 이목에게 편지를 보내 완곡하게 자신을 변명하였으나 이목은 답장하지 않았다. 그해 4월, 다시 도승지에 임명되어, 인조의 측근으로 활동하다가, 그해 7월, 다시 대사헌(大司憲)에 임명 되었다. 이때 인조는 나이 8세가 된 원손(元孫)을 위하여 재신(宰臣) 가운데 학식과 덕망이 있는 자를 엄격히 선발하여 보양관(輔養官)으로 삼았는데, 이조에서는 이목과 이식(李植)·김시국(金蓍國)·김세렴(金世濂)·김육(金堉)·김집(金集) 6인을 원손 보양관으로 뽑아서 아뢰었다.(『인조실록』 21년 10월 25일) 대사헌이목이 글을 올려서 사양하였으나, 인조는 “경은 재주와 학문이 있으니, 진실로 사부(師傅)의 직임에 합당하다. 사양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원손(元孫)은 소현세자(昭顯世子)와 강빈(姜嬪) 사이에 태어난 아들 3형제 중의 맏아들인 경선군(慶善君)이석철(李石鐵,:1636〜1648)인데, 소현세자 내외와 함께 심양(瀋陽)의 질자관(質子館)에 있었다. 그해 9월, 홍문관 부제학(副提學)이 되었다가, 다시 대사간(大司諫)으로 전임 되었고, 그해 10월에 홍문관 부제학이 되었다.

1644년(인조 22) 1월, 홍문관 부제학이목이 경연관(經筵官)을 겸임하였는데, 인조가 오래도록 경연(經筵)을 열지 않자, 이목은 “임금께서는 세 차례나 큰 난리를 겪었습니다. 정묘호란이 <이괄(李适)의 난>보다 심하였고, 병자호란이 정묘호란보다 심하였는데, 지금 만약 난리가 난다면 반드시 병자호란보다 심할 것입니다. 하늘의 뜻과 인심(人心)의 향배가 전하의 마음먹기에 달려있으니, 앞으로 경연(經筵)을 열어서 마음을 다스리는 법을 강론하소서.”라고 아뢰었다. 그해 2월, 다시 대사간(大司諫)에 임명되었으며, 그해 7월, 다시 홍문관 부제학(副提學)에 임명되었다. 이때 좌의정심기원(沈器遠)이 종실(宗室) 이덕인(李德仁)을 추대하려고 역모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처형되었다. 인조는 이덕인을 종실이라고 하여 용서해 주려고 하였으나, 대사간이목은 동료들과 함께 차자를 올려 이덕인을 법대로 처형할 것을 주장하였다.[행장] 그해 8월, 원손(元孫)이 청나라 심양(瀋陽)에서 돌아오자, 원손 보양관이목과 이식 등이 원손에게 문안하였다.(『인조실록』 24년 8월 2일) 그해 9월, 다시 대사헌이 되었다가, 그해 12월, 세자 좌부빈객(左副賓客)에 임명되었는데, 소현세자가 청나라에서 돌아오기 때문이었다. 이때 형조 판서(刑曹判書)의 자리가 비게 되었는데, 의정부에서는 참판 중에서 선발하여 이목을 수망(首望)으로, 서경우(徐景雨)를 부망(副望)으로 추천하였으나, 인조가 서경우를 낙점(落點)하면서,[행장] 이목은 판서로 승진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되었다.

1645년(인조 23) 2월, 소현세자(昭顯世子) 내외가 청나라에서 9년 만에 돌아왔다. 소현세자 내외가 청나라에서 볼모생활을 하는 동안 궁중의 실권은 인조의 총애를 받던 숙원(淑媛) 조씨(趙氏)가 장악하였다. 그러나 세자빈 강씨(姜氏)가 돌아오자, 내명부(內命婦)의 실권을 빼앗긴 숙원 조씨는 소현세자 내외를 원망하게 되었다. 인조는 숙원 조씨가 낳은 외동딸 효명옹주(孝明翁主)를 특별히 사랑하였는데, 효명옹주가 김자점(金自點)의 손자 김세룡(金世龍)과 혼인하자, 인조는 김자점을 우의정으로 임명하였다. 이에 숙원 조씨는 우의정김자점과 손을 잡고 다시 궁중의 실권을 잡으려고 음모를 꾸몄다. 그해 4월 26일, 소현세자가 창경궁(昌慶宮)의 환경전(歡慶殿)에서 갑자기 돌아갔는데, 그 죽음이 타살이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이때 상복(喪服)을 입는 문제를 놓고 논란이 일어났는데, 조선의 제도에는 세자의 상례에 기년복(朞年服)을 입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대사헌이목은 이경석(李景奭), 이식(李植)과 함께 임금의 적통(嫡統)인 세자(世子)의 상(喪)이므로 3년 복이 합당하다고 주장하였지만, 인조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30일 만에 상복을 벗는 안으로 결정하였다.[행장] 그해 4월, 이목은 병조 참판(兵曹參判)이 되었다가, 그해 5월, 다시 홍문관 부제학이 되었다.

그해 6월, 인조의 총애를 받던 숙원 조씨가 우의정김자점과 손을 잡고 원손(元孫)을 폐하고 둘째 왕자 봉림대군(鳳林大君)을 세자로 삼으려고 하였는데, 인조는 결국 조정의 중신 16명을 불러서 봉림대군을 세자로 삼고, 원손을 폐지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때 영의정김류와 우의정김자점은 적극 찬성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입을 다물고 말이 없었는데, 3정승과 6판서, 삼사(三司)의 장관 가운데 이를 반대한 사람은 홍문관 부제학이목 한 사람뿐이었다. 이목은 처음에 세손(世孫)을 후계자로 삼는 것이 정도(正道)이고, 둘째 왕자를 세자(世子)로 삼는 것은 권도(權道)라고 주장하였으나, 회의 분위기가 임금이 뜻에 따라 봉림대군을 세자로 삼는 쪽으로 기울자, 병을 핑계대고 도중에 회의장을 빠져나왔다.(『인조실록』 23년 윤6월 2일) 인조는 부제학이목이 반대하다가, 슬그머니 회의장을 빠져나간 것에 크게 노하여 대간(臺諫)을 불러서 “이목은 병을 핑계대고 곧바로 나가버렸는데, 대간에서 그를 탄핵하지 않고 있는 것은 이상하지 않는가.” 하고 질책하니, 양사(兩司)의 대간들이 모두 인피(引避)하였다. 이에 임금은 대간들을 모두 파직하라고 엄명하였다. 이때 대신(大臣)들이 “부제학이목이 더위를 먹어 병이 정말로 위중하여 회의장을 빠져나갔습니다.”하고 변호하니, 인조의 노여움이 조금 풀어졌다. 그러나 이목은 출사(出仕)하지 않고 임금에게 상소하여 자기를 처벌해 달라고 간청하였으나, 인조가 용서해 주었다.[비문]

1546년(인조 24) 3월, 세자빈 강씨(姜氏)가 궁중에서 저주를 행하고 임금의 수라상[御膳]에 독약을 넣었다고 숙원 조씨가 무고하면서, <강빈(姜嬪) 옥사>가 일어났다. 이 일로 그해 3월 15일 세자빈 강씨가 사사(賜死)당하고, 그의 어린 아들 3형제도 제주도로 귀양 갔다. 이때 대노한 인조는 자기의 어린 친손자들까지 귀양을 보내 죽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강빈의 사사를 적극 반대한 이응시(李應蓍)·심로(沈癆)·홍무적(洪茂績)·이경여(李敬輿) 등도 멀리 귀양 보냈다. 게다가 <강빈 옥사>에 관하여 일체 언급하지 못하도록 조정 안팎에 함구령(緘口令)을 내렸으며, 청나라 용골대(龍骨大)가 원손(元孫)을 청나라로 데리고 가서 보호하겠다고 제의한 것도 거절하였다. <강빈 옥사> 때 세자빈 강씨의 아들 3형제 가운데 4세인 막내만 겨우 살아남고, 나머지 12세와 8세였던 두 형제는 제주도에서 죽었다. 이때 강빈의 아버지 우의정강석기(姜碩期: 1580~1643)는 이미 죽었으나, 강빈의 어머니는 처형되었고, 형제자매들은 모두 장살(杖殺)당하였다. 이목은 강석기와 절친한 사이였으므로, 그 집안이 망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아, 그해 8월 2일, 서울 집에서 돌아가니, 향년 75세였다.

성품과 일화

성품이 단아하고 자상하였으며, 대범하고 중후하였다. 일을 할 때에 항상 정론(正論)을 펴려고 애쓰다가, 여러 번 벼슬에서 쫓겨났으나, 조금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그를 훌륭한 선비라고 칭송하였다.(『인조실록』 24년 8월 2일)

이목(李楘)은 1572년(선조 5) 10월 2일, 아버지 사옹원 봉사(奉事)이신성(李愼誠)과 어머니 원주 변씨(原州邊氏) 사이의 3형제 가운데 맏아들로 태어났다. 어렸을 때, 4촌 형제들과 함께 조모(祖母) 홍씨(洪氏)의 손에서 자랐는데, 단정히 무릎을 꿇고 앉아서 하루 종일 책을 읽는 어린 이목을 할머니 홍씨는 특별히 더 사랑하였다. 나이 13세 때 어머니의 상을 당하였는데, 음식을 먹을 때 나무 숟가락과 나무 젓가락을 사용하는 등 상례(喪禮)를 잘 지켰으며, 한동네 아이들이 대문 밖에서 불러도 한 번도 나가서 어울려 놀지 않았다.[행장] 어린아이였을 때 교관(敎官)이대순(李大淳)에게 3년 동안 글을 배웠다. 나이 20 세가 되어 관례(冠禮)를 치른 뒤에는 우계(牛溪)성혼(成渾)의 문하에서 수학하다가, 우계성혼이 세상을 떠나자, 사계(沙溪)김장생(金長生)의 문하에서 학업을 계속하였는데, 특히 예학(禮學) 연구에 힘을 기울였다. 김장생의 아들 신독재(愼獨齋)김집(金集: 1574~1656)과 친한 벗이 되어, 경전(經典)과 사서(史書)를 함께 토론하였고, 나라에 큰일이 있을 때마다 거취(去就)를 서로 상의하여 결정하였다.[행장] 이로써 미루어 보면, 이목은 언관(言官)으로서 서인의 사계(沙溪) 학파를 대변하는 역할을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목은 젊어서부터 부지런히 학문에 매진하였는데, 아무리 어려울 때나 바쁜 때에도 독서(讀書)를 게을리 한 적이 없었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가족이 모두 근처 골짜기로 가서 피난하였는데, 당시 21세였던 이목은 온 힘을 다해 할머니 홍씨를 부축하기도 하고, 등에 업기도 하면서 여러 번 위험을 피하였다. 이목은 재빨리 달아나고 몸을 숨겨야 하는 피난 중에도 항상 책을 가지고 다녔는데, 왜적이 물러가면 책을 펴서 읽고, 왜적이 다가오면 책을 소매 속에 넣고 달아났다. 피난 중에 할머니 홍씨가 병이 나서 돌아갔는데, 임종 전에 이목에게 “이 난리 중에 고생하면서 나를 효성으로 봉양하였고, 지극한 정성으로 책 읽기를 게을리 하지 않으니, 하늘이 지각이 있다면, 반드시 내 손자를 창성(昌盛)하게 만들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목은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길에 나가 삼사(三司)의 관직에 있을 때에도, 바쁜 공무 중에 조금의 틈이라도 생기면, 옷깃을 단정히 여미고 그 자리에 정좌(正坐)하여 책을 읽고 또 깊이 사색하였는데, 어려서부터 장성하고 늙어서까지 학문에 대한 열성이 한결같았다.[행장]

이목은 후학(後學)들을 가르칠 때마다 강론할 내용을 철저히 연구하고 <사서오경(四書五經)>의 원문을 외운 다음에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는 『예기(禮記)』의 어려운 글을 거듭 읽고 그 은미한 뜻을 거듭 궁리하여 예론(禮論)을 강론하였으므로, 마침내 예학의 이론에 정통하였는데, 사대부(士大夫)들이 예론에 대하여 의문점이 있으면 반드시 그를 찾아가서 질정(質正)하였다. 이목은 항상 “<사서오경(四書五經)>은 일반 사서(史書)와는 다르다. 한 글자 한 구절도 모두 심오한 뜻이 있으니, 입으로 읽기만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였는데, 후학들에게 침잠하여 사색하고 반드시 그 뜻을 스스로 궁리하도록 하였다.[행장] 이목은 평소에 항상 사랑채에 거처하면서, 밤새도록 숙연하게 글을 읽었는데 게으른 기색이 없었고, 혼자 있을 때에는 더욱 몸을 조심하였다.[행장] 이목은 사람을 대할 때 항상 예(禮)를 다하였는데, 비록 미천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비록 어린아이라고 하더라도 글을 배우려고 그를 찾아오면 반드시 의관을 정제하고 만나보았다. 그의 문하생 가운데 사헌부 장령(掌令)정양(鄭瀁), 시강원 진선(進善)신석번(申碩蕃), 예조 참의이척연(李惕然) 등이 유명하다. [비문]

이목은 일찍 부모를 여의었으므로 봉양을 다하지 못하는 것을 항상 애통하게 생각하였다. 제자들에게 『소학(小學)』을 가르칠 때마다, 본문의 “자식 된 자는 부모를 섬기는 데 효성을 다한다.”라는 대목에 이르면, 갑자기 목이 메어 “나 같은 사람은 효도를 하고 싶어도 부모가 계시지 않으니, 누구를 위하여 효도를 하겠는가.”라고 하였다.[행장] 제사를 지낼 때에는 몸소 집 안팎의 깊숙한 곳부터 담장의 안까지 반드시 깨끗하게 청소하고, 제수(祭需)를 장만할 때에는 두세 번 두루 살펴서 정결하게 하도록 힘썼다. 제삿날에는 한밤중에 일어나 세수하고 머리를 빗은 다음에 옷을 갈아입고 닭이 울기를 기다렸다. 특히 부모의 제삿날에는 상중에 있는 사람처럼 침소에 거적을 깔았다. 말년에 병에 걸려 몸소 전(奠)을 올리지 못할 때에는, 말석(末席)에 엎드려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니, 일가친척이 너나없이 모두 감동하였다.[행장]

이목은 아버지 이신성(李愼誠)의 상(喪)을 당한 그 다음해에 자기 부인의 상을 당하였는데, 자신이 어버이 상복을 입었다고 하여 부인의 시신을 염습하는 데 참석하지 않았다. 예학(禮學)의 대가인 사계(沙溪)김장생(金長生)과 신독재(愼獨齋)김집(金集) 부자도 부부간에 도저히 실천하기 어려운 일이라며 이목의 이러한 행동을 칭찬하였다. 이목이 충청도 지방의 고을 수령관으로 있을 때, 이웃 고을에 사는 서출 누이동생이 전염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서둘러 누이동생의 집으로 찾아갔다. 이때 누이동생은 사람을 시켜서 도중에 기다리고 있다가 제발 오지 말라고 간청하였는데, 이목은 “너를 돌보아줄 부모가 없는데, 내가 어찌 병에 전염될 것을 염려하여, 동기간의 전염병을 구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고, 기어이 전염병이 걸린 누이동생을 찾아가 병을 고쳐 주었다.[비문]

이목은 청탁을 싫어하여 사적으로 남에게 부탁하는 글을 쓰지 않았으며, 예물을 주고받는 것도 신중하여, 명분이 없는 선물은 비록 작은 물건이라도 받은 적이 없었다. 조정의 삼관(三館)에 있을 때에는 임금에게 직언(直言)하기를 좋아하였으며, 임금의 뜻에 아부하고 따르는 자가 있으면 경멸하여 마지않았다. 인조가 비록 위엄으로 억눌러도 이목의 직언은 꺾이지 않았으니, 인조가 노할 때가 많아서 자주 파직되거나 좌천되었다. 형조 판서(刑曹判書)의 자리가 비었을 때, 의정부에서 이목을 수망(首望)으로 추천하였으나, 인조가 부망(副望)을 낙점(落點)하면서, 판서로 승진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되었던 것도 인조가 이목의 직언(直言)을 싫어하였기 때문이다. 대사헌(大司憲)으로 있을 때에는 낯빛을 엄숙하게 하고 문무백관들의 기강을 다스리니, 조정이 엄숙하고 서로 공경하였다. 경연(經筵)에 경연관(經筵官)으로 있을 때와 성균관에 대사성(大司成)으로 있을 때에는 정성과 성의를 다하여 강론하여 예학의 정론(正論)을 펼쳐보고자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당시의 덕망 있는 선비들이 모두 이목에게 큰 기대와 희망을 걸었다.[행장]

이목(李楘)이 늙어서 병세가 위독해지자, 자제들이 의원을 부르려고 하였는데, 이목은 “공자(孔子)와 같은 성인과 주자(朱子)와 같은 현인도 수명이 70여 세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만한 덕(德)도 없는 데 그들보다 더 오래 살려고 한다면 망령된 짓이 아니겠는가.”라며 만류하였다. 운명할 즈음에 사위 이해창(李海昌)이 이목에게 마지막 남길 말씀을 청하니, “나는 세상에 아무런 미련이 없다.”며 끝내 한마디 말도 남기지 않았다.[행장] 세상 사람들은 이목의 벼슬이 그의 덕망(德望)에 걸맞지 않게 하위(下位)에만 머물러서, 그가 쌓은 학문을 모두 펼쳐보지 못하고 죽은 것을 매우 안타깝게 여겼다.[비문]

묘소와 후손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묘소는 경기 금천현(衿川縣) 삼성산(三聖山)의 선영(先塋)에 있는데, 약천(藥泉)남구만(南九萬)이 지은 신도비명(神道碑銘)이 남아있다.[비문] 명재(明齋)윤증(尹拯)이 지은 이목의 행장(行狀)이 남아 있다.[『명재유고』 46권] 죽은 뒤에 영의정(領議政)으로 추증되었다.

첫째부인 직산조씨(稷山趙氏)는 생원(生員) 조직(趙稷)의 딸이고, 둘째부인 장수황씨(長水黃氏)는 학생(學生) 황우(黃佑)의 딸이고, 셋째부인 고령신씨(高靈申氏)는 학생(學生) 신득준(申得濬)의 딸이다. 황씨가 1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 이지항(李之恒)은 문과에 급제하고 홍문관 부제학(副提學)을 지냈고, 딸은 홍문관 응교(應敎)이해창(李海昌)에게 시집갔다. 신씨는 1녀를 낳았는데, 군수(郡守)조억(趙億)에게 시집갔다. 측실에서 2남 2녀를 낳았는데, 주부(主簿)이지징(李之憕)과 이지회(李之恢)이고, 장녀는 생원 신간(辛暕)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오명도(吳鳴道)에게 시집갔다.[행장] 장남 이지항은 3남을 낳았는데, 목사(牧使)이원구(李元龜), 현감(縣監)이중구(李重龜), 도사(都事)이징구(李徵龜)이다.[비문]

참고문헌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인조실록(仁祖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인조]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약천집(藥泉集)』
  • 『명재유고(明齋遺稿)』
  • 『국조보감(國朝寶鑑)』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임하필기(林下筆記)』
  • 『청음집(淸陰集)』
  • 『계해정사록(癸亥靖社錄)』
  • 『서계집(西溪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