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보흠(李甫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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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57년(세조 3) = ?]. 조선 초기 세종(世宗)~세조(世祖) 때의 문신. 성균관(成均館) 주부(注簿)와 대구군지사(大邱郡知事), 순흥부사(順興府使) 등을 역임했다. 자는 경부(敬夫)이고, 호는 대전(大田)이다. 본관은 영천(永川)이며, 거주지는 서울과 순흥이다. 아버지는 부사직(副司直)이현보(李玄寶)이고, 어머니 인동 장씨(仁同張氏)는 장표(張彪)의 딸이다. 세조 대에 순흥에 유배 온 금성대군(錦城大君)이유(李瑜)와 함께 단종(端宗)의 복위를 꾀했다는 혐의를 받고 유배된 후 끝내 교살 당했다. 정조(正祖) 대에 복원되었다.

세종 시대 활동

이보흠은 1429년(세종 11)에 식년 문과에 급제하고, 이듬해 동부훈도관(東部訓導官)으로서 공법(貢法)에 대한 논의에 참여해 조세를 1결당 10두로 고정하는 방안에 반대했다. 1434년(세종 16)부터는 사정(司正)으로서 돈녕부(敦寧府) 첨지사(僉知事)안구(安玖), 병조 좌랑(佐郞)우효강(禹孝剛) 등과 함께 『자치통감훈의(資治通鑑訓義)』 찬수를 시작해 1년 뒤인 1435(세종 17)에 작업을 완료했다.(『세종실록』 12년 8월 10일),(『세종실록』 16년 6월 29일),(『세종실록』 17년 6월 8일) 1443년(세종 25) 서장관(書狀官)으로서 중국에 다녀왔는데, 방물 수목을 잘못 기재해 처벌받았다. 같은 해에 돌의 크기를 다르게 사용함으로써 축성할 때의 노동력은 줄이고 성벽의 견고함은 늘이는 효율적인 축성 방안에 대한 상소를 올렸다. 이듬해인 1444년(세종 26)에는 부사직에서 사직(司直)으로 승진했으나, 대간(臺諫)들이 검핵(檢覈)하지 않아 문제시되었다. 이보흠은 사은(謝恩)을 행해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으나, 도리어 의정부의 조사를 받고 장 1백대를 속(贖)바쳤다.(『세종실록』 25년 4월 15일),(『세종실록』 25년 11월 3일),(『세종실록』 26년 1월 6일) 1446년(세종 28)에는 공법의 폐단에 대한 상소를 올렸고, 1448년(세종 30)에는 함양군지사(咸陽郡知事)로 있다가 대구군지사에 임명되었다. 당시 사창(社倉)의 시행여부를 두고 집현전 학자들과 조정 대신들 간의 이견이 있었는데, 세종은 대구 지역에서 사창을 시험적으로 실시해보고자 이보흠을 특별히 임명했다. 이후 이보흠은 사창을 성공적으로 운영해 백성들이 사사로운 장리(長利)를 이용하지 않아도 되는 이로움을 얻었다고 보고했다.(『세종실록』 28년 7월 2일),(『세종실록』 30년 1월 25일),(『세종실록』 30년 5월 15일),(『세종실록』 30년 6월 1일).

문종~세조 시대 활동

이보흠은 1452년(문종 2)까지 대구군지사로서 사창을 시험적으로 실시했다. 이 기간 중에 자급이 더해지고 화질(華秩)에 임명되기도 했지만, 고을의 재물을 남용했다는 죄목으로 탄핵 받기도 했다.(『문종실록』 즉위년 9월 18일),(『문종실록』 즉위년 12월 24일),(『문종실록』 1년 4월 19일),(『문종실록』 1년 8월 15일) 1452년(문종 2)에는 사헌부(司憲府) 장령(掌令)에 제수되었고, 이후 장령으로서 관원들의 비리 감찰 및 불사(佛事) 금지와 관련해 활발히 활동했다. 1454년(단종 2)에는 직예문관(直藝文館)으로서 『세종실록(世宗實錄)』 편찬에 참여했다.[『세종실록』 부록 편수관명단],(『문종실록』 2년 2월 3일),(『문종실록』 2년 3월 20일),(『문종실록』 2년 4월 16일),(『단종실록』 즉위년 5월 20일),(『단종실록』 즉위년 6월 20일)

1457년(세조 3)에는 순흥부사에 제수되었는데, 이후 이보흠은 1456년(세조 2)에 순흥으로 유배 와 있던 금성대군이유의 역모사건에 휘말렸다. 금성대군은 이보흠을 만나 칼을 들고 한편으로는 예알(禮謁)하며 모반에 참여하도록 강요하였고, 이보흠은 어쩔 수 없이 격문을 써주는 등 모반에 참여하는 한편 이 사실을 치계(馳啓)함으로써 조정에 금성대군의 모반 사실을 알렸다. 하지만 <금성대군의 모반 사건>에 대해 추국이 진행되면서 이보흠 역시 금성대군에게 가담했다는 사실이 부각되었다. 그 결과 모반을 꾸민 금성대군과 어쩔 수 없이 가담한 이보흠은 다르게 봐야한다는 세조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이보흠 또한 처벌해야한다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결국 이보흠은 박천(博川)으로 유배된 뒤에 같은 해 10월 교살되었다.(『세조실록』 3년 7월 3일),(『세조실록』 3년 7월 9일),(『세조실록』 3년 9월 10일),(『세조실록』 3년 10월 9일),(『세조실록』 3년 10월 13일),(『세조실록』 3년 10월 20일),(『세조실록』 3년 10월 27일)

한편 후대의 기록에서는 이보흠이 금성대군과 함께 격문을 만들어 거사를 준비했지만, 기천현감(基川縣監)이 이를 조정에 알려 거사가 발각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어 『조선왕조실록』과 약간 다른 내용을 보이기도 한다.[『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단종조 고사본말(端宗朝故事本末)],[『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권43 「장광선대시입절인(莊光禪代時立節人)」] 정조 대에 복권되어 장릉(莊陵) 배식단(配食壇)의 정단(正壇)에 배향되었다.(『정조실록』 15년 2월 21일),(『정조실록』 15년 2월 21일) 충청도 청안(淸安)의 향사(鄕祠), 광주(光州)의 대치사(大峙祠), 순흥의 성인단(成仁壇), 영천의 송곡서원(松谷書院)에 제향되었다.[『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별집 권4],[『재향지(梓鄕誌)』 순흥지]

참고문헌

  • 『세종실록(世宗實錄)』
  • 『문종실록(文宗實錄)』
  • 『단종실록(端宗實錄)』
  • 『세조실록(世祖實錄)』
  • 『정조실록(正祖實錄)』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재향지(梓鄕誌)』
  • 『영천이씨족보(永川李氏族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