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검(李希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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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16년(중종 11)∼1579년(선조 12) = 64세]. 조선 중기 명종~선조 때의 문신. 행직(行職)은 도승지(都承旨)·병조 판서(兵曹判書)·형조 판서(刑曹判書)이고, 증직(贈職)은 영의정(領議政)이다. 자(字)는 경질(景質)이고, 호(號)는 동고(東皐)·국재(菊齋)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생부는 하동령(河東令) 이유(李裕)이고, 생모 진주유씨(晉州柳氏)는 유곤원(柳坤元)의 딸이다. 양부는 신당부령(神堂副令) 이정(李禎)이고, 양모 진주강씨(晉州姜氏)는 강황(姜璜)의 딸이다. 태종의 서출 제 1왕자 경녕군(敬寧君)이비(李裶)의 5대손이고, 형조 참판이희득(李希得)의 형이다. 지봉(芝峯)이수광(李晬光)의 아버지이고, 영의정이성구(李聖求)의 조부이다.

명종 초기에 과거에 급제한 후, 예조와 병조의 좌랑을 거쳐, 경상도 도사(道事)로 나갔다가 돌아와, 예조 정랑이 되었다. 사간원과 사헌부의 양사(兩司)에서 대간(臺諫)의 관직을 두루 역임하면서, 언관(言官)으로서 불편부당의 중립을 지켰으므로, 사헌부 장령을 무려 여덟 차례나 역임하였다. 명종 후기에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된 후, 우부승지(右副承旨)가 되었으나, 명종의 왕비 인순왕후(仁順王后)의 외삼촌 이량(李樑)의 국정 전횡을 탄핵하다가, 도리어 경기 장단 부사(長湍府使)로 좌천되었다. 그러나 이량 일파가 사림파의 영수들을 제거하려다가, 심의겸(沈義謙)에게 발각되어, 대간의 탄핵을 받고 유배되자, 다시 우승지에 임명되었다. 이어 좌승지(左承旨)가 되었다가, 병조 참의(兵曹參議)로 전임되었다.

선조 초기에 황해도 관찰사(觀察使)로 나갔다가, 다시 예조 참의(禮曹參議)가 되었다. 명나라 신종(神宗)만력제(萬曆帝)에게 시호(諡號)를 올리는 것을 축하하는 존호사(尊號使)에 임명되어 명나라 북경(北京)에 다녀온 후, 도승지(都承旨)로 영전되었다. 이후 공조 판서(工曹判書)와 형조 판서(刑曹判書)를 거쳐서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임명되었는데, 재임 중에 갑자기 돌아갔다. 만년에 동대문(東大門) 밖의 언덕바지에 살았는데, 이곳에 산다고 하여 스스로 호를 ‘동고(東皐)’라고 불렀다. 이곳에는 후부인 유씨(柳氏)의 증조부인 세종 때의 청백리 재상 유관(柳寬)이 살았던 옛집이 있었다. 이희검의 아들 이수광(李晬光)은 어렸을 때 외갓집에서 자랐는데, 그는 집 뒤에 있는 상산(商山)의 한 봉우리 지봉(芝峯)을 좋아하여, 자신의 호(號)를 지봉(芝峯)이라고 하였다.

명종 시대 활동

1546년(명종 1) 사마시(司馬試) 생원과(生員科)에 합격하고, 바로 그 해에 증광(增廣)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31세였다.[『국조방목(國朝榜目)』] 뒤이어 형 이희온(李希溫)·이희량(李希良)과 동생 이희득(李希得) 세 사람이 연달아 과거에 급제하였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한 집안의 7형제 가운데 4형제가 과거에 합격하였다며 아주 부러워하였다.[비문]

처음에 성균관 학유(學諭)에 보임되었는데, 박사(博士)를 거쳐, 전적(典籍)으로 차례로 승진하였다. 1550년(명종 5) 예조 좌랑(禮曹左郞)이 되었다가, 병조 좌랑(兵曹左郞)에 임명되었다. 그 뒤에 경상도 도사(道事)로 나갔다가, 예조 정랑(禮曹正郞)이 되었으며, 사헌부 지평(持平)으로 전임되었다. 이때부터 사간원과 사헌부의 양사(兩司)에서 대간(臺諫)의 관직을 역임하였는데, 언관(言官)으로서 불편부당의 중립을 지켰으나, 너무 유화(柔和)하다는 비판을 받았다. 1554년(명종 9) 사헌부 장령(掌令)이 되었는데, 이후 무려 여덟 차례나 장령을 역임하였다.[비문] 1555년(명종 10) 사간원헌납(獻納)에 임명되었는데, 대간(臺諫)으로 있을 때 항상 지제교(知製敎)를 겸임하였다.다시 사헌부 장령으로 전임되었다가, 1556년(명종 11) 다시 사헌부 장령이 되었고,1557년(명종 12) 또 다시 사헌부 장령에 임명되었다. 1558년(명종 13) 사헌부 집의(執義)로 승진되었다.

1559년(명종 14) 다시 사헌부 장령이 되었다가, 홍문관으로 들어가 부교리(副校理)를 거쳐 교리(校理)로 승진하였다. 이때 명종이 홍문관 관리 15명에게 글제를 내어 제술(製述)을 시험하였는데, 이희검의 문장이 우수한 글로 뽑혔다. 그 뒤에 성균관에서 사예(司藝)·사성(司成)으로 차례로 승진하였다. 1560년(명종 15) 세자시강원 필선(弼善)이 되었다가, 다시 사간원 사간(司諫)이 되었다. 명종은 외삼촌 윤원형(尹元衡)의 전횡을 견제하기 위하여 인순왕후(仁順王后: 심의겸의 누이)의 외삼촌 이량을 중용하였는데, 이때 사간원 대사간에 임명된 이량(李樑)이 이감(李戡) 등과 결당하여 그 세력을 키우려고 하였다. 이희검은 그들을 바로잡으려고 하였으나, 오히려 이량의 미움을 받아 한직인 오위장(五衛將)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1561년(명종 15)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품(陞品)되고,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되었다. 이어 우부승지(右副承旨)가 되어, 명종의 최측근으로 활동하였으나, 외척 이량(李樑)의 전횡을 반대하다가 체직되었다. 1562년(명종 16) 이조 참판이 된 이량은 이희검을 경기 장단 부사(長湍府使)로 좌천시켰으나, 그곳에서 선정(善政)을 베풀어 순리(循吏)라는 칭송 받았다.

1563년(명종 18) 둘째아들 이수광(李晬光)이 장단 부사의 관사에서 태어났다. 그때 이량 일파가 기대승(奇大升)·허엽(許曄)·윤두수(尹斗壽) 등 사림파의 영수들을 제거하려고 하다가, 그 조카 심의겸(沈義謙)에 발각되면서, 대간(臺諫)의 탄핵을 받고 유배되었다. 이에 명종이 이희검을 우승지에 임명하면서, 다시 조정으로 돌아왔는데, 장단 사람들이 송덕비(頌德碑)를 세워, 그의 업적을 기렸다. 그해 가을에 생부 하동군(河東君)이유(李裕)의 상을 당하여, 3년 간 선영(先塋)에서 형제들과 함께 여묘살이를 하였다. 1565년(명종 20) 상례를 끝마친 후, 다시 우승지에 임명되었다가, 1566년(명종 21) 좌승지(左承旨)가 되었다. 그러나 그해 10월에 명종이 내려주는 술을 마시고 취하여 어전에서 실수를 하였는데, 이 일로 명종은 이희검에게 술을 마시지 말라는 엄명을 내렸을 뿐 아니라, 승지에서 병조 참의(兵曹參議)로 좌천되었다.(『명종실록』 21년 10월 23일) 그 뒤에 선공감(繕工監)·제용감(濟用監)의 정(正)과 사섬시(司贍寺)·사도시(司䆃寺)의 정(正)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비문]

선조 시대 활동

1567년(선조 즉위년) 예조 참의(禮曹參議)가 되었다가, 좌·우부승지를 거쳐, 병조 참의(兵曹參議)가 되었다. 1569년(선조 2) 황해도 관찰사(觀察使)로 나갔는데, 그해 가을에 생모 진주유씨(晉州柳氏)가 별세하고, 연이어 1570년(선조 3)에 양모 진주강씨(晉州姜氏)가 별세하였다. 이때 이희검의 나이가 55세였는데, 노쇠한 몸으로 여묘살이를 하였으나, 조금도 상례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1572년(선조 5) 복제(服制)를 끝마친 후, 다시 예조 참의가 되었다. 그해 9월에 선조가 춘당대(春塘臺)에서 대제학과 함께 이문(吏文)을 출제하였는데, 제목은 ‘예조가 우리 남녀의 복식을 모두 중국의 제도를 따르기를 중국에 청한다.’는 것이었다. 먼저 강관(講官) 5인이 중국어[漢語]를 강론하였는데,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약(略: 중등)이었고 세 사람이 조(粗: 하등)였다. 중국과 왕래하는 외교 문서에 쓰이는 이문(吏文)을 지은 20여 인 중에서는 중등이 세 사람이었고, 하등이 세 사람이었는데, 예조 참의이희검(李希儉)은 하등을 차지하였다.(『선조실록』 5년 9월 14일) 비록 이희검은 이 시험에서 하등을 받았으나, 중국어와 이문(吏文)을 다루어야 하는 관리들을 대상으로 한 시험이었으므로, 그의 이문(吏文)실력은 이미 수준급이었는데, 가학(家學)을 통하여 아버지에게 중국어와 이문(吏文)을 배운 아들 이수광도 이에 능통하였다.

1572년(선조 5) 장례원(掌隷院) 판결사(判決使)가 되었다. 그때 명나라목종(穆宗)융경제(隆慶帝)가 돌아가고 신종(神宗)만력제(萬曆帝)가 즉위하면서, 조선에서는 죽은 황제에게 시호(諡號)를 올리는 것을 축하하는 존시사(尊諡使)와 존호사(尊號使)를 파견하게 되었다. 1573년(선조 6) 이희검은 존호사(尊號使)에 임명되어 중국 명나라 북경(北京)에 갔다가 돌아왔는데, 그해 6월에 도승지(都承旨)로 영전되어, 선조의 최측근이 되었다. 그때 인종의 왕비 인성왕후(仁聖王后)가 병환이 났다. 도승지이희검이 내의원의 약방(藥房) 제조(提調)로서 시약(侍藥)하였는데, 왕비의 병이 완쾌되자, 그 공으로 종2품하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품되었다. 얼마 뒤에 대사헌(大司憲)이 되었다가, 예조 참판(禮曹參判)에 임명되었다.

1574년(선조 7) 과거의 고시관(考試官)에 임명되어, 문과(文科)의 급제자를 선발하였으며, 뒤 이어 대사간(大司諫)이 되었다. 1575년(선조 8) 명종의 왕비 인순왕후(仁順王后)가 돌아가자, 강릉(康陵: 명종과 인순왕후의 왕릉)의 수릉관(守陵官)에 임명되었다. 선조가 몸소 침원(寢園)에 거둥하여 제향을 올린 후, 수릉관이희검을 종2품상 가의대부(嘉義大夫)로 가자(加資)하였다. 1577년(선조 10) 선조가 혼전(魂殿)에 거둥하여 대상(大祥)을 지내고 상식(上食)과 별다례(別茶禮)를 거행한 후, 수릉관이희검을 정2품하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품(陞品)하고, 안마(鞍馬)·의복(衣服)을 하사하였다.(『선조실록』 10년 1월 2일) 그 후 돈령부 지사(知事)가 되었으며, 그해 겨울에 특명으로 공조 판서(工曹判書)에 임명되었다. 1578년(선조 11) 형조 판서(刑曹判書)가 되었고, 그해 11월에 병조 판서(兵曹判書)가 되었는데, 경연(經筵) 지사(知事)를 겸임하였다.

1579년(선조 12) 2월 1일, 병조 판서 재임 중에 갑자기 돌아가니, 향년 64세였다. 그때 둘째부인의 소생인 아들 이수광(李晬光)은 나이가 겨우 17세였고, 딸들은 모두 어렸다. 이희검의 부음(訃音)을 듣고 놀라움을 금치 못한 선조는 시신(侍臣)에게 “병조 판서가 갑자기 서거하니, 내 마음이 매우 애통하다.”고 하며 이틀 동안 철조(輟朝: 조회를 정지함)하였다. 또 예관(禮官)을 보내 조제(弔祭)하였으며, 특별히 제주 황감(黃柑)을 비롯한 부의 물품을 많이 하사하였다.[비문]

문집으로 『동고집(東皐集)』이 있다.

성품과 일화

풍채가 빼어나고 듬직하였으며, 성품이 부드럽고 온화하였다.[비문] 도량이 넓고 재능이 뛰어났다. 그러나 타고난 성품이 유화(柔和)하여 유약함을 벗어나지 못하였다는 비판을 받았다.(『명종실록』 21년 윤10월 24일)평소에 가무(歌舞)와 여색(女色)을 멀리 하고, 권세와 재리(財利)에 마음이 흔들리는 일이 없었으며, 어릴 때부터 늙을 때 까지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관직이 점차 높아졌으나 포의(布衣)의 선비처럼 가난한 생활을 하였다. 공무 이외에는 권세가의 집에 가지 않았고, 부모를 섬길 때에는 언제나 그 안색을 살펴서 그 뜻을 어기는 일이 없었으며, 아우를 사랑하고 형을 존경하였다. 7형제 가운데 한 아우가 가난해서 집을 마련하지 못하자, 그는 자신의 땅을 떼어 그 아우의 집을 지어 주었으며,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은 조카들을 모두 양육하여 혼인까지 시켜주었다. 그가 입는 의복은 겨우 맨몸을 가리는 정도였고, 음식은 주린 배를 채우는 정도였다. 집안에 쌀독이 자주 바닥이 드러날 정도였으나 이를 개의치 않았다. 병조 판서 재임 중에 별세한 그의 장례 때, 염습(殮襲)할 의복이 없고 장사를 지낼 식량과 포백이 없어서 친척에게 빌려올 정도로 가난하고 청빈하였으므로, 나라에서 부의 물품을 많이 하사하였다.[비문]

1559년(명종 14) 5월, 명종은 홍문관의 젊은 관원 15명을 불러 ‘승정원에 노쇠한 사람을 쓰지 말자.’는 글제를 내고 글을 짓게 하였는데, 이희검과 유승선(柳承善)·박근원(朴謹元)·장사중(張士重)·이양원(李陽元) 등이 지은 글이 우수한 문장으로 뽑혔다. 당시 대신들이 노쇠한 늙은 사람을 승지로 천거하였기 때문에 명종이 젊은 승지를 발탁하려고 한 것이었다. 이때 명종은 대제학홍섬(洪暹)에게 “보통 출제는 문형(文衡)에게 맡겨야 되는 것이지만, 예로부터 간혹 임금이 글제를 낸 적이 있었으므로, 지난번에 내가 ‘승정원에 노쇠한 사람을 쓰지 말자.’는 글제를 낸 것이다. 내가 지금 옥당(玉堂: 홍문관)에서 제술한 글을 읽어보니, 과차(科次)의 고하를 막론하고 모두 문의(文意)에 맞았다. 나처럼 시가를 모르는 임금이 글제를 내는 것은 문아(文雅)를 권장하기 위한 것도 있지만, 신하 되는 사람의 글에서 충후(忠厚)·사정(邪正)과 신밀(愼密)·경박(輕薄)한 뜻이 있는가를 살펴보기 위한 것이었다. 나의 어리석은 견해로는 15명이 지은 글 중에서 이희검(李希儉)이 ‘어렵고 신중한 자리는 후설(喉舌: 승정원)이 가장 첫 번째이다.’ 라고 쓴 글이 그 제목에 가장 맞는 듯하다.”고 전교하였는데, 명종은 이희검의 글을 보고 아무런 배경이 없는 그를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하였다.(『명종실록』 14년 5월 27일)

1566년(명종 21) 10월, 명종이 내원(內苑)에서 재상들에게 연회를 베풀었을 때, 임금이 좌우의 신하들에게 농담으로 누가 술을 많이 마시느냐고 묻자, 좌승지이희검이 “신도 술에는 상당히 자신이 있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명종이 이희검에게 큰 잔으로 마시라고 명하였고, 그는 임금이 내려주는 술을 사양하지 않고 마시게 되었는데, 결국 임금의 명령조차 붓으로 받아 쓸 수 없을 정도로 만취하게 되었으므로, 보다 못한 명종이 중관(中官: 환관)으로 하여금 촛불을 들고 그를 부축해서 나가도록 하였다.[비문] 이때가 명종의 어머니 문정왕후(文定王后)의 국상(國喪) 중 이었으므로, 모두가 술을 절제하는 시기였을 뿐만 아니라, 또 가뭄으로 임금과 신하가 천변(天變)을 두려워하며 근신(謹愼)하던 때였다. 그 다음날 명종은 승정원에 “지금은 국휼(國恤)하는 시기이고 평상시가 아니니, 마땅히 술을 적게 마셔야 할 것이다. 더구나 요즘같이 천변이 있는 때에 근시(近侍)에 있는 자(좌승지이희검)가 술에 취하여 판부(判付)를 쓸 수 없을 정도까지 이른 것은 사체에 온당치 못하다. 추운 날씨 때문에 어한주(禦寒酒)를 없앨 수는 없지만, 금후로는 술을 적게 마셔야 될 것이다.”라고 전교하였다. 이일을 송구스럽게 여긴 이희검은 사임하는 글을 올렸는데, 마침내 체직되었다.(『명종실록』 21년 10월 23일)

그는 의정부(議政府)에서 국사(國事)를 논의할 때, 작은 일은 아랫사람에게 맡기고, 큰일만을 챙겼다. 어려운 일을 당하여 조정에서 의견이 분분(紛紛)할 때에는 그 시비(是非)를 따져서 결단하였는데, 소신이 확고하여 남의 말에 흔들리지 않았다. 인종의 왕비 인성왕후(仁聖王后)가 돌아가자, 초상 때 상복(喪服)을 정하는 문제를 놓고 의견이 분분하였는데, 도승지이희검은 세자(世子)가 선왕(先王)의 왕통을 이어 받는 계체(繼體)의 상복을 적용하여 마땅히 삼년상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니, 의논하는 자들이 마침내 조용해졌다. 그는 명종 때 조정의 논의가 사림파(士林派)와 훈구파(勳舊派)로 나뉘어 당파(黨派) 싸움을 벌이는 것을 항상 걱정하였다. 어떤 친구가 이희검에게 “그럼 어느 편을 따르겠는가.”하고 묻자, 이희검이 웃으며 “내가 어느 편을 따른다는 말인가. 내가 편당을 가르는 사람인가.”라고 하였다.[비문] 이희검은 아들 이수광에게 당파 싸움에 휩쓸리지 말고 불편부당(不偏不黨)하라고 가르쳤으므로, 동인과 서인이 나누어 싸울 때, 이수광은 당파를 초월하여 중립을 지키려고 노력하였다.

이희검은 만년에 동대문(東大門) 밖 지금의 창신동 언덕바지에 살았는데, ‘동쪽 언덕바지’에 산다고 하여 스스로 호를 ‘동고(東皐)’라고 불렀다. 이곳에는 후부인 유씨(柳氏)의 증조부인 세종 때의 청백리 재상 유관(柳寬)이 살았던 옛집이 있었다. 우의정유관은 담장이 없는 초가집에서 비가 오면 밤새도록 우산을 받치고 살았다는 고사(故事)가 전해 질 정도로 청백리로서 소문이 났다. 만년에 우의정유관의 옛집을 인수한 이희검은 옛집을 그대로 둔 채, 낡은 곳만 대충 수리하였다. 어떤 친구가 집이 너무 누추하다고 비웃으니, 이희검은 웃으며 “그래도 우산을 받치고 사는 것에 비하면 조금 더 낫다.”고 변명하였다. 아들 이수광(李晬光)은 어렸을 때 외갓집에서 자랐는데, 그 집 뒤에 있는 상산(商山): 지금의 낙사)의 한 봉우리인 지봉(芝峯)을 좋아하여, 지봉(芝峯)을 그의 호(號)로 삼았다. <임진왜란> 때 정승 유관의 옛집이 불타버리자, 이수광은 그 집을 다시 짓고 집의 이름을 ‘비우당(庇雨堂)’이라고 하였는데, ‘겨우 비를 피할 수 있는 집’이라는 뜻이다. 이수광은 광해군 때 이곳에서 『지봉유설(芝峯類說)』을 집필하였다.

1560년(명종 15) 1월에 이희검이 사간원 사간(司諫)이 되었다. 당시 명종은 외삼촌 윤원형(尹元衡)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왕비인 인순왕후(仁順王后)의 외삼촌 이량(李樑) 중용하였다. 이때 대사간(大司諫)에 임명된 이량은 자기 세력을 키우려고 이감(李戡)·윤백원(尹百源) 등과 결당하였는데, 사간이희검이 그들을 바로잡으려고 하다가 결국 대사간이량의 미움을 사서 몇 년 동안 산직(散職)으로 밀려났다. 1562년(명종 17) 이량이 이조 참판이 되자, 이희검을 경기 장단 부사(長湍府使)로 좌천시켰다. 장단 부사이희검은 정령을 간소하게 하고 조세(租稅)를 감면하여 선정(善政)을 베풀었으므로 순리(循吏)라고 칭송되었다. 이후 이량 일파는 기대승(奇大升)·허엽(許曄)·윤두수(尹斗壽)·이산해(李山海) 등을 제거하려고 하다가, 조카 심의겸(沈義謙)에게 발각되었는데, 이조 판서이량은 결국 대간(臺諫)의 탄핵을 받아 평안도 강계(江界)로 유배되었다. 이에 명종이 이희검은 다시 우승지에 임명하자, 조정으로 돌아오게 되었는데, 장단의 백성들이 길을 가로막고 더 유임할 것을 청하였으며, 장단의 백성들이 송덕비(頌德碑)를 세워 그 덕을 기렸다. 그 후, 30년이 지난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는데, 의주(義州)로 피난 갔던 선조가 서울이 수복되면서, 1593년(선조 26) 10월, 서울로 돌아오는 도중에 장단(長湍)의 동파역(東坡驛)에서 행차를 머물고 쉬고 있었다. 이때 선조는 길가에 세워진 이희검의 송덕비를 보고 그 비문을 써서 바치게 하였다. 이때 이수광이 사헌부 집의(執義)로서 어가(御駕)를 수종(隨從)하고 있었는데, 이 송덕비를 본 선조가 이수광의 아버지 이희검을 극구 칭찬하였으며, 반열에 있던 대소 신료들도 모두 두 부자를 입이 마르도록 칭송하였다고 한다.[비문]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 양주(楊州) 서산(西山) 장흥리(長興里)의 선영(先塋)에 있는데, 상촌(象村)신흠(申欽)이 지은 신도비명(神道碑銘)이 남아 있다.[『상촌집(象村集)』 27권] 무덤은 지금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삼하리 산90-1번지에 있다. 첫째부인 진주강씨(晉州姜氏)는 학생(學生) 강호덕(姜好德)의 딸인데, 자녀는 1남을 낳았다. 둘째부인 진주유씨(晉州柳氏)는 군기시 첨정(僉正)유오(柳塢)의 딸인데, 자녀는 1남 4녀를 낳았다. 장남 이겸광(李謙光)은 일찍 죽었는데, 전부인 강씨가 낳았다. 차남 이수광(李晬光)은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지냈다. 장녀는 이인가(李仁可)에게, 차녀는 참봉 유석준(柳錫俊)에게, 3녀는 유학(幼學) 민수경(閔守慶)에게 각각 시집갔는데, 모두 후부인 유씨가 낳았다. 손자 이성구(李聖求)는 문과에 급제하여 영의정(領議政)을 지냈고, 손자 이민구(李敏求)는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을 지냈는데, 모두 지봉(芝峯)이수광(李晬光)의 아들이다.

후부인 유씨는 정숙하고 착하며, 청순하고 침착하였다. 아들 이수광(李晬光)을 잘 가르쳐 훌륭한 대학자로 키워냈을 뿐 아니라, 시부모를 잘 섬기고, 전부인 강씨(姜氏)가 낳은 맏아들 이겸광(李謙光)을 마치 자기가 낳은 자식과 같이 잘 보살펴서 길러냈다. 부인 유씨는 남편 이희검이 돌아간 후, 살던 집을 맏아들 이겸광에게 넘겨주고 제사를 받들도록 하면서 “내 아이는 그런대로 살아갈 수 있으니, 어찌 집 없는 것이 문제가 되겠는가.”하고 말하였다. 주위 사람들이 안 된다고 말리자, 부인 유씨는 “우리 집은 청백리 집안인데, 내가 누를 끼칠 수는 없다.”고 정색하며 꾸짖었다. 그러나 맏아들 이겸광은 약관의 나이가 되기 전에 병으로 죽었다. 부인 유씨의 증조부는 세종 때의 청백리 재상 유관(柳寬)이었는데, 유씨는 아들 이수광에게 유관의 고사(故事)를 들려주며 청백리가 되도록 격려하였다. 또한 항상 자녀들에게 중국 춘추(春秋) 시대 초(楚)나라 재상 손숙오(孫叔敖)처럼 남에게 음덕을 베풀라고 권장하였는데, 초나라 장왕(莊王)을 도와 패업(霸業)을 이룩한 손숙오는 천성이 청렴하고 남에게 음덕을 베풀어, 그가 죽은 뒤에 후손들이 그 덕을 입었다고 한다.[『사기(史記)』 119권]

유씨는 아들 이수광(李晬光)이 젊은 나이에 승지(承旨)가 되었을 때도, 기뻐하지 않으며 “승진이 너무 빠르지 않느냐. 부디 매사를 신중히 하여라.”하고 경계의 말을 하였다. <임진왜란> 이 일어나자, 집안사람들이 모두 함경도로 피난을 갔다. 그러나 아들 이수광은 경상도 방어사(防禦使)조경(趙儆)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지방에 내려가 있었으므로, 어머니가 아들의 생사를 알지 못한 지 반년이나 되었다. 이수광의 누이동생들이 오빠의 안위를 걱정하다가 간혹 눈물을 흘리면, 부인 유씨는 항상 “우리 선대(先代)와 우리 부자(夫子: 남편)께서 착하지 않은 일을 하신 적이 없으니, 우리 아이는 반드시 염려가 없을 것이다.”하고 태연하게 다독였다. 왜적과 싸우던 종사관이수광은 군사가 궤멸 당하자, 홀로 의주(義州)의 행재소(行在所)로 갔다. 이때 이수광이 선조에게 늙은 어머니가 함경도에 있다고 아뢰자, 선조는 특별히 그를 선유(宣諭) 어사(御使)에 임명하여 함경도로 보냈다. 이에 이수광은 마천령(摩天嶺)을 넘어 명천(明天)으로 가서 어머니와 누이들을 만나볼 수 있었다. 후부인 유씨는 남편 이희검보다 16년을 더 살다가, 63세인 1595년(선조28) 별세하여, 경기 양주(楊州) 서산(西山) 장흥리(長興里)에 묻혔는데, 남편 이희검과 같은 묘역(墓域)이다.[비문]

참고문헌

  • 『명종실록(明宗實錄)』
  • 『선조실록(宣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지봉집(芝峯集)』
  • 『상촌집(象村集)』
  • 『견한잡록(遣閑雜錄)』
  • 『미암집(眉巖集)』
  • 『부상록(扶桑錄)』
  • 『사기(史記)』
  • 『석담일기(石潭日記)』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임하필기(林下筆記)』
  • 『학봉전집(鶴峯全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