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철(朴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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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85년(선조 18)~1656년(효종 7) = 72세]. 조선 후기 인조(仁祖)~효종(孝宗) 때 활동한 문신. 대구부사(大丘府使)와 재령군수(載寧郡守) 등을 지냈다. 자는 형원(亨遠)이고, 호는 기와(棄窩)이다. 본관은 함양(咸陽)이며,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판관(判官)박충생(朴忠生)이고, 어머니 충주 지씨(忠州池氏)는 별제(別提)지세함(池世涵)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사옹원(司饔院)직장(直長)을 지낸 박여헌(朴黎獻)이며, 증조할아버지는 성균관(成均館)전적(典籍)을 지낸 박유(朴瑜)이다. 남곽(南郭)박동열(朴東說)의 문인이기도 하다.

인조 시대 활동

1606년(선조 39) 사마시(司馬試)에 생원(生員)으로 합격하였다. 광해군(光海君) 시대에는 정치가 어지럽다하여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인조반정 이후 의금부(義禁府)도사(都事)를 지내고, 1627년(인조 5) <정묘호란(丁卯胡亂)> 때에는 인조를 호종하여 강화도로 갔다. 환도 후, 내자시(內資寺) 직장直長)을 거쳐서, 통례원(通禮院)인의(引儀)에 올랐으며, 이후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로 전임되었다. 호조 판서(判書)로 있던 사람이 그의 유능함을 듣고 천거하여 호조 좌랑(佐郞)이 되었는데, 출납이 분명하고 부정이 용납되지 않았다. 연천현감(漣川縣監)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기도 전에 신창현감(新昌縣監)에 임명되었는데, 은결(隱結)을 모두 적발해 내고 백성의 부역을 크게 줄였다.

1633년(인조 11)에 광흥창(廣興倉)주부(主簿)를 거쳐 이산현감(尼山縣監)이 되었다. 당시에 양전(量田) 사업이 시행되었는데, 그는 몸소 들판을 돌아다니면서 실정에 맞게 토지의 등급을 매겼다. 당시 고을에 관리되지 않고 폐기된 저수지가 많이 있어 백성들이 그 속에서 몰래 경작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가 이 상황을 지켜보더니 “사사로운 은혜나 조그마한 원망 따위는 고려할 가치도 없다.”며 저수지의 바닥을 파내고 깨끗이 정리를 한 다음에 저수지의 물을 비축했다가 방출하는 규정을 만들었는데, 이 사업으로 지금까지도 이산의 백성들이 가뭄으로 고생하는 일이 드물었다. 백성에게 명령할 때에는 분명하게 기한을 제시하고 약속한대로 그날에 시행하니, 제반 조세의 징수가 모두 한 번 거두는 것으로 끝이 났으며, 이것이 마침내 풍습이 되었다. 그는 매년 봄에 받는 녹봉까지도 덜어내어 백성에게 주었으므로, 관청의 경비 또한 넉넉하였다. 그 밖에도 백성들에게 혜택을 베푼 정사가 많아 다 기록할 수가 없을 정도였으므로, 포상을 건의한 암행어사의 장계에 따라 표리(表裏)를 하사받기도 하였다.

몇 년 후, 전생서(典牲署) 주부로 복귀하여, 종친부(宗親府)전부(典簿)를 거쳐서, 1644년(인조 22) 금산군수(金山郡守)에 임명되었다. 당시 영남 지방은 토호들이 횡포를 부려 요역과 세금의 부과가 고르지 못하였다. 그가 이 폐단을 강력하게 혁파하고 밀린 세금을 독촉하여 백성의 요역을 대신하니, 3년이 지나서는 오히려 여유가 생겨 피폐한 백성이 크게 기뻐하였다. 반면에 부호들은 많이 원망하였으므로, 결국 어사의 무고를 받아 파직되었다.

1649년(인조27) 사복시(司僕寺)첨정(僉正)에 제수되었다. 이때 외구(外廐)에서 기르던 명마(名馬)를 훈신(勳臣)이 마음대로 끌고 가므로 그가 담당 아전을 치죄(治罪)하여 도로 가져오게 하니 사람들이 어려운 일을 했다고 칭찬하였다. 당시 이조 판서이던 신독재(愼獨齋)김집(金集)이 말하기를, “박철이 지방 고을의 수령으로 있으면서 훌륭한 실적을 거둔 바 있으니, 지금 비록 늙었다 하나 극읍(劇邑)을 다스리게 할 만하다.”하고는 그를 대구부사에 임명하였다. 그는 이번에도 금산을 다스리던 방식으로 다스렸으나 대구는 풍속이 금산보다도 더 심하였는데, 결국 토호들의 협박에 못 이겨 관직을 그만두고 돌아왔다.

1653년(효종4) 정승 심지원(沈之源)이 그의 치적을 아뢰어 재령군수에 임명되었다. 그는 영남 지방에서 두 번이나 곤욕을 겪은 데다, 나이도 많아 관직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지만 혐의를 받을까 염려되어 마지못해 부임하였다. 서로(西路) 지방은 청나라 사신을 영송(迎送)하는 일을 전적으로 맡고 있어 관리들이 백성에게 끝없이 갈취하였다. 고을에 내수사(內需司)의 노비가 1000명 가까이 되어 쇄관(刷官)이 올 때마다 문안(文案)을 수정한다는 핑계로 장기간 머물면서 침탈을 일삼고는 기어이 저들의 욕심을 다 채운 다음에야 떠났다. 그는 이 폐단을 깊이 통감하고, 미리 장부를 만들어 두었다가 쇄관이 오면 그날로 노비의 점고에 들어가 저들이 핑계하고 머무는 일을 하지 못하게 만드니, 그에 대한 칭송이 길에 자자하였으나, 이듬해에 늙었다는 이유로 관직을 그만두고 돌아왔다.

이전에 그가 직산(稷山)에서 돌아온 뒤에 수원(水原)의 용성(龍城) 북쪽에 몇 칸의 집을 짓고 ‘기와(棄窩)’라 이름 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집 앞에 계단을 만들고 꽃나무를 심어 유유자적하다가 1656년(효종7) 10월 7일 집에서 별세하였다.

성품과 일화

박철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사람됨이 굳건하고 사려가 깊었다. 평소에 농담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종일토록 경건한 자세를 유지하였다. 일을 할 때는 느슨하게 처리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일은 반드시 끝을 보고야 말았다. 집안에서는 근검절약을 실천하였는데, 초가집에서 살면서도 마음 편히 지냈다. 관직 생활을 할 때에는 공적인 물품을 가져다 쓰지 않고 집안일을 챙기지 않아 식구들이 좋은 음식을 맛보지 못했다. 송사를 할 때에는 사건을 명확하게 처리하였으므로, 그 지역에 큰 소송이 일어나면 감사가 반드시 그에게 사건을 맡겼다. 하지만, 그는 겉치레를 일삼지 않고 비굴하게 처신을 하지 않았기에 내외의 관직을 역임하면서 오랫동안 재직한 곳이 드물었다. 오직 충청도 이산(尼山)에서만은 임기를 다 채웠는데, 그 또한 만년에 이산 백성을 잘 다스려 보려 했다고 말하였다.

그는 효성과 우애가 지극하였다. 어린 나이에 모친을 여읜 것이 늘 커다란 아픔으로 남아서 부친에게 항상 맛있는 음식을 해 드렸으며, 생신에는 장수를 비는 술을 올리고 색동옷을 입고 춤추어 아주 기쁘게 해 드렸다. 부친이 돌아가신 후에는 화려한 옷을 입지 않았고, 나이가 들고 병이 심했을 때조차도 여전히 제삿날의 재계를 폐하지 않았다. 만약 일이 있어 사당에 들어갈 수 없을 때에는 반드시 지방(紙榜)을 만들어 놓고 제사를 지냈다.

자식들을 가르칠 때는 성실을 가장 강조하였고, 친구들과 교제할 때는 언제나 신의를 지켰다. 평소의 성품이 재물과 이익에 관계된 일에 특히 깨끗하였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단지 공의 뛰어난 관리 수행 능력만 알 뿐, 그 근본을 이루는 사람됨이 또한 이와 같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죽음이 임박하자 스스로 초상과 제사의 규정을 만들어 이를 써서 자손들에게 물려주면서 말하기를, “제사는 국제(國制)에 따라 3대까지만 지내고, 찬품(饌品)과 의절(儀節)은 한결같이 『격몽요결(擊蒙要訣)』에 따라 시행할 것이며, 널 속에 비단 조각을 넣어 누를 끼치는 짓은 하지 마라.”로 하였다. 또 “72살까지 살았으면 충분하다.”하고는 약을 먹지 않고 물리친 후, 세상을 떠났다.

묘소와 후손

윤증(尹拯)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있다.[『명재유고(明齋遺稿)』 권37 「대구부사박공묘갈명(大丘府使朴公墓碣銘)」] 묘소는 처음 수원의 남쪽 청룡리(靑龍里)에 안장되었다가, 1684년(숙종10) 10월 계묘일에 충청도 청양현(靑陽縣) 남쪽 연자치(燕子峙) 아래로 이장되었다.

첫째 부인 양주 조씨(楊州趙氏)는 소민공(昭敏公)조존성(調存性) 딸인데, 자녀는 1녀를 낳고 별세하였는데, 딸은 별좌(別坐)기진경(奇震慶)의 처가 되었다. 둘째 부인 전주 이씨(全州李氏)는 현감이덕보(李德溥)의 딸인데, 자녀는 3남 4녀를 두었다. 장남은 현감박성부(朴成阜)이고, 차남은 직장박숭부((朴崇阜)이다. 장녀는 참봉이석무(李碩茂)의 처가 되었고, 차녀는 이조 좌랑신익상(申翼相)의 처가 되었는데, 1자와 2녀는 요절하였다. 측실 소생으로 아들 둘을 두었는데, 박길부((朴吉阜)와 박시부((朴時阜)이다.

참고문헌

  • 『인조실록(仁祖實錄)』
  • 『명재유고(明齋遺稿)』
  • 『사마방목(司馬榜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