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선당(樂善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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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승전, 시민당과 함께 동궁 권역의 서연(講筵)하던 장소.

개설

낙선당의 창건 시기는 명확하지 않으나, 1647년(인조 25) 저승전(儲承殿) 중수 때 함께 보수된 기록이 『저승전의궤(儲承殿儀軌)』에 남아 있다. 광해군대에 다시 지은 ‘동궐’은 인조반정과 이괄의 난을 연이어 겪으며 소실되었다. 이후 1633년(인조 11)에는 창경궁을, 1647년에는 창덕궁을 재건하면서 동궁 권역도 복구가 이루어졌다.

1756년(영조 32) 5월 사도세자(思悼世子)가 머물러 있던 낙선당 온돌에서 촛대가 넘어지며 화재가 일어났다(『영조실록』 32년 5월 1일). 이 때문에 가까이 있던 양정합(養正閤)까지 소실되었으며, 이후 낙선당은 동궁의 부속 건물로는 다시 복원되지 못하였다.

위치 및 용도

낙선당을 동궁의 정당이라고 하면서도(『영조실록』32년 5월 1일), 혜경궁(惠慶宮) 홍씨(洪氏)의 『한중록(閑中錄)』에서는 왕세자가 서연하는 장소라고도 기록하고 있다. 왕세자의 서연 장소이기도 하였지만, 왕실의 서책 및 여러 기록물을 보관하는 장소로도 쓰였다.

낙선당의 본래 장소는 지금의 낙선재 자리라고 추정되기도 하지만 명확하지 않다. 「동궐도(東闕圖)」상에 보이는 수강재(壽康齋)·진수당(進修堂)·시민당(時敏堂) 터는 17~18세기 창경궁 내 동궁 권역의 각 위치를 추정하는 단서이다. 낙선당이 존재하던 시기의 주변 전각으로는 저승전·낙선당·관희합(觀熙閤)·덕성합(德成閤)·양정합·시민당·손지각(孫志閣) 등이 있었다. 저승전과 낙선당은 동서로 좌우에 배치되어 있었고 관희합과 덕성합은 낙선당의 부속 건물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양정합은 낙선당의 남쪽에 있었고, 시민당은 손지각이 부속 건물로 딸려 있는 양정합 동남쪽의 전각이었다고 보인다. 시민당의 뒤편에는 진수당이 배치되어 있었는데, 영조의 첫 번째 세자인 효장세자(孝章世子)가 머물던 곳이다.

『한중록』은 낙선당 화재의 정황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낙선당의 온돌에서 춘당과 사도세자가 입대하던 중, 화를 내는 상황에서 촛대가 쓰러지며 남창에 불이 붙었다. 걷잡을 수 없이 불이 번졌지만 화가 난 세자는 춘방을 쫓아 덕성합으로 내려가는 문 앞에 달려갔다. 이때 창덕궁 동문에서 사도세자를 찾아가던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동선을 따라가 보면, 진수당으로 들어가는 집현문이 닫혀 있자 시민당 앞으로 돌아 보화문 쪽으로 갔다. 덕성합을 지날 즈음 이 난리를 만났고, 관희합은 한일자로 놓여 있었지만 화재를 피했다는 등의 정황이 묘사되어 있다. 이를 통해 낙선당과 관희합은 하나로 이루어진 전각이고 덕성합은 그 아래쪽에 배치되었던 건물로 볼 수 있다.

『일성록』에는 저승전 앞마당에 우물이 있어 낙선당 화재 후 사도세자가 이 우물로 달려가[禁井之變] 빠지려 했다고 전한다. 「동궐도」에서 보면, 수강재와 담을 사이에 두고 꽃과 나무가 무성한 전각의 빈터에서 우물이 확인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이 자리가 건양문(建陽門) 밖, 저승전의 옛터인 것 같은데 1764년(영조 40)에 저승전 역시 소실된다.

정조 때, 그 건물들이 들어 있던 영역 안에 수강재가 조영된다. 이러한 일련의 정황을 풀어 보면 낙선당은 수강재 뒷마당, 즉 북쪽에 나란히 놓인 두 단의 빈 기단만 남아 있는 그 장소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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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천 및 현황

낙선당이 처음 지어진 시기는 알려져 있지 않다. 불타 없어지고 다시 짓기를 반복하다가 1756년(영조 32) 화재로 소실된 이후 재건되지 않았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국조보감(國朝寶鑑)』
  • 『궁궐지(宮闕志)』「동궐도(東闕圖)」「동궐도형(東闕圖形)」『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창덕궁]저승전의궤([昌德宮]儲承殿儀軌)』
  • 『한중록(閑中錄)』
  • 『홍재전서(弘齋全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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