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책(空頂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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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과 대한제국 시기 왕세자나 왕세손이 관례를 치르기 전에 쓰는 관.

개설

공정책(空頂幘)은 판(板)을 없앤 평천관(平天冠)으로 정례(正禮) 때에 쓰는 관이다. 일반적으로 왕세자나 왕세손이 관례를 치르기 전에 썼다. 왕세자나 왕세손으로 책봉될 때에는 칠장복(七章服)에 공정책을 쓰며, 입학례를 치르기 위해 출궁할 때에는 곤룡포에 공정책을 썼다. 백관으로부터 진하(進賀)를 받을 때는 강사포에 공정책을 썼으며, 관례를 치르기 위해 처음 방에서 나올 때도 도포에 공정책을 썼다.

연원 및 변천

공정책은 왕세자가 관례를 치르기 전 책봉을 받기 위하여 전정(前庭)으로 나올 때 쓰는 관이다.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는 면복을 갖춘다고 하였으나 『춘관통고(春官通考)』에는 왕세자가 관례 전이라면 쌍동계(雙童髻)와 공정책, 칠장복을 갖춘다고 하였다. 즉, 책례할 때의 복식은 관례와의 선후가 문제가 되는 것으로, 『국조오례의』를 보면 관례는 3권에 수록되어 있고 책례는 4권에 들어 있으며, 구례(舊例)에도 관례를 먼저 하고 책례를 뒤에 하는 것이 순편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왕세자 책봉은 나라의 근본을 정하는 것으로 반드시 관례를 치르고 난 후 책례를 거행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관례를 치르지 않은 왕세자의 책례 복식은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1521년(중종 16) 질정관최세진(崔世珍)이 경사에서 돌아오면서 ‘소요건(逍遙巾)’ 하나를 가져왔다. 처음에는 그것의 쓰임을 알지 못하였으나 그 뒤 김의(金義)가 전해 오길, “소요건은 일명 공정책”이라고 하였다(『중종실록』 16년 1월 26일). 민간에서 어린아이들이 머리 꼭대기의 머리카락을 한 가닥이나 두 가닥으로 묶고서 이 소요건을 덮어 썼는데, 보통의 아이들은 뿔이나 뼈로 된 비녀를 사용하였으나 황태자의 경우에는 쌍옥도(雙玉導)를 소요건의 양쪽에 가로질러 꿰어 소요건이 움직이지 않도록 하였다.

1667년(현종 8) 세자의 책례를 치르기 위해 왕세자의 복식을 상고하는 과정에서 공정책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이 자리에서 현종은, “평천관은 관례를 치르기 전에 쓸 수 없으므로 책례 때는 공정책을 쓰기로 일찍이 의논하여 결정하였는데, 지금은 쌍계만으로 정하였으므로 이와 같이 하면 위에 쓰는 것이 없어서 타당하지 않다.”고 하였다(『현종실록』 8년 1월 11일).

이에 홍문관(弘文館)에서, “『두씨통전(杜氏通典)』이나 『문헌통고(文獻通考)』 등의 책을 상고해 보니, 황태자가 관례를 치르기 전에는 쌍동계와 공정흑개책(空頂黑介幘)·쌍옥도에 보석 장식을 한다고 하였는데, 그 제도는 이미 도형(圖形)이 없고 주소(註疏)에도 명백하게 나타난 곳이 없었습니다. 또 『당서(唐書)』 거복지(車服志)를 상고해 보니 ‘흑개책의 청수분(靑綬粉)은 길이가 6척 4촌이며, 너비가 4촌으로 색깔은 그 끈과 같은데, 3품(品) 이상은 3량(梁), 5품 이상은 2량, 9품 이상은 1량으로 한다.’ 하였습니다. 이는 그 당시 경사(卿士)들이 착용했던 것으로 양(梁)이 있는 책(幘)입니다. 또 『진서(晉書)』에 이르기를 ‘동자책(童子幘)은 옥(屋)이 없다.’ 하였는데, 옥은 곧 양입니다. 이로써 미루어 보면 책은 동일한데 양이 있으면 흑개책이 되고 양이 없으면 공정흑개책이 됩니다. 그렇다면 『문헌통고』에 이른바 태자가 관례를 치르기 전에 착용한다는 공정책은 양이 없는 흑개책인 듯합니다. 그 제도는 오늘날의 양관(梁冠)을 모방하되 옥이 없게 하면 되겠습니다. 이 밖에는 다시 상고할 곳이 없습니다.”고 아뢰므로 현종이 공정흑개책을 모방하여 공정책을 만들도록 하였다.

1690년(숙종 16) 왕세자의 책례 때는 1667년(현종 8)의 예에 따라 쌍동계·공정책·칠장복으로 행례를 하였으며(『숙종실록』 16년 4월 19일), 1736년(영조 12) 원자를 책봉하여 왕세자로 삼을 때도 왕세자는 쌍동계·공정책·칠장복을 갖추고 배위(拜位)로 나아갔다(『영조실록』 12년 3월 15일). 『국조속오례의보(國朝續五禮儀補)』 서례에 관례 전 책복 제도(幘服制度)의 도설이 실려 있어 이 후에는 관례 전 책봉할 때에 공정책을 착용하였다.

형태

『국조속오례의보』 서례에 의하면, 공정책은 면(冕)과 같지만 판이 없고 유(旒)가 없으며, 모라로 싸고 금종이로 싼다고 하였다.

용도

1742년(영조 18) 왕세자가 입학할 때에 쌍동계·공정책·곤룡포를 갖추고 태학에 나아갔으며(『영조실록』 18년 3월 26일), 1817년(순조 17) 왕세자가 문묘에 나아가 작헌례(酌獻禮)를 행하기 위해 나아갈 때에도 쌍동계·공정책·곤룡포를 입고 나아갔다(『순조실록』 17년 3월 11일). 또한 1819년(순조 19) 왕세자의 관례를 경현당(景賢堂)에서 행하였는데, 이때 왕세자는 공정책에 도포를 갖추고 자리에 나아갔다(『순조실록』 19년 3월 20일). 이상으로 보아 공정책은 왕세자나 왕세손이 관례를 치르기 전에 착용하는 예관(禮冠)이었음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 『국조오례의보(國朝續五禮儀補)』
  • 권오영 외, 『조선왕실의 가례』, 한국학중앙연구원, 2008.
  • 유희경, 『한국복식사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1983.

관계망